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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놓고 ‘식민사학’? 사료 놓고 따져보자”(한겨레 2016-03-0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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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14
내용

“덮어놓고 ‘식민사학’? 사료 놓고 따져보자”

 

(* 누르면 크게 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학계가 사회적 논란으로까지 번진 고대사 문제에 적극 대응에 나서는 모양새다. 젊은 학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고대사 강역 문제는 지난해 국회 토론장에 두차례나 올랐다. 동북아역사재단이 학계에 연구용역을 주어 편찬 중인 동북아역사지도 강역 표기에 대한 논란도 불붙었다. 학자들은 그간 강단 학계 바깥의 재야 학자들의 주장에 별반 대응을 하지 않은 탓에 이들의 주장이 이른바 ‘민족사학’의 외양 아래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다고 우려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낙랑군 요서설’ 학문적 반격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였는가는 고조선·고구려 강역과 연결되는 탓에 ‘위대한 상고사(고조선사)’를 얘기하는 이른바 ‘재야 학자’들의 단골 연구 소재였다. 역사저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사학 박사)은 지난해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역사특위) 토론회와 같은 해 펴낸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란 책을 통해 편찬 중인 동북아역사지도의 내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강역이었다 주장하고, 일본의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지도”라며 편찬에 참가한 학자들을 “식민사학자”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매국 대 애국의 프레임을 내건 셈이다.

 

 

젊은 역사학자들, 공개 비판 나서
“재야, 낙랑군 평양설 무조건 매도
영토 이상집착…‘역사파시즘’ 우려”

 

 

정약용 등 실학자들 ‘평양설’ 지지
해방뒤 발굴한 북한 낙랑고분서도
목간 등 ‘평양설’ 증거사료들 나와
연구결과 “낙랑 지배층은 고조선인”

 

 

이덕일 등 재야서 내놓은 중국사료
주류 “낙랑 멸망뒤 요서 이동 설명”
사실과 사료에 근거한 역사 강조

 

 

■ 적극 대응 나서는 역사학계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가 내는 계간 <역사비평>은 봄호 기획특집(‘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에 젊은 학자 3명의 글을 싣고 “과거 국가의 국력과 영토에 이상 집착하는 일련의 비합리적인 행위”를 ‘사이비 역사학’이라 규정했다. 기경량 강원대 역사교육과 강사는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이란 글에서 ‘위대한 상고사’의 실재를 주장하는 이들이 박정희 정권 때인 1970년대부터 등장하게 된 뿌리(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를 살피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위서로 결론난 <환단고기>를 내세우다 최근엔 중국 사료를 거론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70년대에 나온 주장의 답습이라고 짚었다. 그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와 동궤에 있는 ‘역사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경희대 인문학연구원 부설)도 ‘젊은연구자모임’을 주축 삼아 일반 시민·학생과 소통에 적극 나섰다. 정확한 고대사 인식을 나누기 위해 매달 컬로퀴엄(집단토론)을 여는 한편, 대학생 아카데미 프로그램과 일반 시민 강좌도 열고 있다. 올 1~2월 ‘위서의 사회사’, ‘한사군, 식민사학 프레임의 문제’를 주제로 컬로퀴엄을 열었다. 다음달엔 ‘식민지·탈식민지’를 주제로 하여 열 예정이다. 여기에는 학계 내 진보적 역사단체로 꼽히는 역문연과 한국역사연구회가 함께하고 있다.

 

젊은 학자들은 국회 역사특위 토론 과정에서 보수세력은 물론 일부 진보적 지식인과 야권 정치인들마저 이른바 위대한 상고사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데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이정빈 고대사·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위대한 상고사를 얘기하는 주장에 일부 진보적 지식인, 더불어민주당·정의당 일부 의원도 호응한다. 이런 흐름은 고대사를 강조하는 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뒷받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진보적 역사단체들이 연대하여 이런 흐름을 막고 사실과 사료에 근거한 정확한 역사를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2월 문 연 창비학당의 역사강좌에 임기환·송호정·강종훈(고대사), 도현철·안병우·한명기(중세사) 같은 중견 학자가 대거 나서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학문 성과를 모아 작업해온 역사지도 편찬사업이 좌초될 처지에 놓였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낙랑군 한반도 설치설이 식민사학? 국회 토론 과정에서 이덕일 소장은 낙랑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에 비정(비교하여 정함)하는 학계 통설을 두고 “일제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 이래 식민사학의 카르텔”에 따른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주장의 반복이라고 주장했다. 학계는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우선 낙랑군 평양 설치설은 일본 학자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제기되는 여러 논리는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서 다 나와 있었으며, 이들은 국내 사료와 중국 1차 사료로 상당한 연구를 진척시켰다는 것이다. 17세기 이익이 요동설을 주장했으나 17세기 한백겸, 18·19세기 유득공·정약용·한진서는 낙랑 중심지는 평양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란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위가야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고 얘기한다.

 

또한 통설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이후 평양에서 발굴된 고분 유물 발굴 성과와 사료 연구 축적에 힘입어 비정됐다고 지적한다. 안정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장은 “일제 때 발굴된 황해도·평안도 일대 낙랑 고분 수는 70기에 불과하지만, 해방 이후 발굴한 고분은 1990년대 중반까지 2600여기에 이른다”며 “이병도는 연구사적으로 낙랑군 한반도 비정을 결정지은 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사군 전공자인 윤용구 박사(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는 “한사군 관련 논문 1000여편 중 이병도의 논문은 10편뿐이며 그나마 현도군 등의 위치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다 부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 “낙랑은 고조선인이 주축이 된 사회”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공격을 받아 함락될 때까지 420년 넘게 존속했다. 학자들은 외려 한국 학계가 유물·사료 연구를 통해 낙랑이 중국사회였다는 오랜 통념을 논파했다고 밝힌다.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해 낙랑 지배층은 한족, 피지배층은 고조선계 토착민이라고 주장했고, 중국 학계에도 낙랑이 중국사회라는 통념이 있었다. 그러나 학계가 평양의 낙랑 지배층 고분(나무곽무덤)에서 다수 발굴된 고조선계 세형동검(한국식 동검)과 인구·호구 조사를 기록한 목간을 연구하여 “낙랑 지배층 상당수가 고조선 토착민이고, 낙랑의 실질적 주인은 위만조선 이래 그곳에 살아온 고조선 사람들”(윤용구)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안정준 분과장은 “낙랑군에 중국인은 소수였고 토착민이 압도적이었다”며 “한의 군현이란 외형과 거기 파견된 중국 관리의 존재만으로 낙랑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구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근대 이후의 민족적 자긍심이나 영토 관념에 투영시키는 것은 당시 시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낙랑 위치 쟁점 보니 최근 몇년 새 제기된 낙랑 요서설이 비전공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것은 “중국 1차 사료”를 거론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몇년 전까지만 해도 <환단고기>에 기댄 위대한 고조선론이 주종이었던 반면, 이덕일 소장과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한서>, <사기>, <후한서>, <태강지리지> 같은 중국 사서를 얘기한다.(표 참조) 이 소장은 여러 사료를 거론하며 낙랑의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청대 <독사방여기요> 기록을 근거로 낙랑은 중국 허베이성 루룽현(현 창리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석구 한밭대 교수(고구려발해학회 회장)는 “낙랑군 조선현이 루룽현에 있다는 그 기록은 한반도의 낙랑군이 멸망한 뒤 일부 유민이 요서로 옮겨간 상황을 적은 것이며 그 지역 패권자 모용외가 유민에게 낙랑군을 만들어주고 낙랑태수란 관직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심 원장은 청대 <사고전서>에 집대성된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는 대목을 들며 “갈석·갈석산은 허베이성 바오딩(보정)의 수성(쑤이청)진”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요서설보다 더 서쪽에 낙랑이 있었단 주장이다. 공 교수는 “우뚝 솟은 돌산이란 뜻의 갈석(갈석산)은 기록상 적어도 두 곳 이상 있다”며 “<태강지리지>의 갈석산은 바오딩이 아니라 루룽현 갈석산을 설명하는 사료이고, 낙랑 일부 유민이 루룽현 지역으로 옮겨간 상황을 적은 것”이라고 말했다.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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