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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이라는 주홍글씨, 어디까지 타당한가(경향신문 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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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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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식민사학'이라는 주홍글씨, 어디까지 타당한가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지난 2014년 3월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 발대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 주간경향 자료 

 

재야사학계, 역사학계 ‘한사군 한반도설’ 등 식민사학으로 규정

젊은 역사학자들 “재야사학계 주장은 사이비 역사학” 본격 반박 

국정교과서 ‘고대사 부풀리기’ 맞물려 뜨거운 ‘역사전쟁’ 예고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존재하는 역사연구에서 ‘사이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난폭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재야사학계로부터 ‘식민사학’이라는 공격을 받아온 역사학계가 최근 본격적인 반박에 나섰다. 지난달 말 출간된 계간 <역사비평> 봄호에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주제로 실린 세 편의 글을 통해서다. 필진은 강원대 사학과 강사인 기경량씨,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위가야씨, 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안정준씨 등 30대 젊은 연구자들이다. 기경량씨는 총론 성격의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에서 고대사 분야와 관련한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규정하고 “사이비 역사학의 특징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 광대한 고대영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모론”이라고 지적했다. 

석박사급 소장 연구자 30여명은 지난해 여름 ‘젊은연구자모임’(‘연구자모임’)을 만들고 같은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네 차례 고대사 관련 콜로키움을 열어 문제의식을 공유해왔다. <역사비평>에 실린 글은 연구자모임이 콜로키엄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정리해 공적 지면에는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다. 

젊은 연구자들이 행동에 나선 배경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두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2014년 3월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 본부(‘국민운동본부’)가 출범했다. 국민운동본부에는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이 참여했다. 2014년 4월 국민운동본부는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소 ‘한국고대사 연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그해 초 발간된 연구서 <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이 식민사관을 담고 있다며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감사원은 내용은 판단하지 않고 사업 과정에서 심사절차가 누락됐다고 발표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사업을 중단했다. 지난해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2008년부터 예산 45억원을 투입하고 60여명의 역사학자들이 참여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이 재야사학자들의 도마에 올랐다. 이덕일 소장을 비롯한 재야사학자들은 이 지도 역시 식민사관을 따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는 이 같은 비난에 호응해 같은해 4월 임시회의를 열고 동북아역사재단과 지도편찬위원회의 책임을 추궁했다. 지난 1월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도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며 재단 용역을 받아 사업을 진행한 서강대 연세대 사업단과의 협약을 해약하고 연구비 일부도 환수하겠다고 통보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두 사업을 중단 또는 전면 재검토한 표면적인 이유는 감사원 감사와 지도의 형식적 오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두 경우 모두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에 표시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평가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한사군 한반도설’이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역사학계의 통설을 담았다는 이유로 수십여명의 역사학자들이 참여하고 국책연구기관이 수입억의 비용을 쏟아부은 두 사업이 사실상 모두 좌초했고, 오랜 기간 연구를 통해 확립된 학계 통설이 일거에 여야를 막론한 국회의원들로부터 식민사학 아니냐는 추궁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학인가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는 ‘요서설’은 고조선의 강역이 대륙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점에서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고 주장하는 재야사학계의 핵심 논거다. 잘 알려져 있듯, 일제 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문헌실증과 발굴을 통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비정(비교해 정함)했다. 이덕일 소장 등 재야사학계는 이를 빌미로 역사학계의 ‘한사군 한반도설’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식민사관이자 매국사관이라고 공격해왔다. 그 원인이 일제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의 후예들인 식민사학자들의 카르텔이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재야사학자들의 단골 메뉴다. 

<역사비평>에 기고한 세 연구자들은 역사학계의 통설에 입각해 이 같은 재야사학자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우선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비정한 것은 일본 학자들이 처음으로 한 일이 아니다. 조선 전기에 여러 사서들이 중국 사서의 주석서들을 바탕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했고, 이어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 17세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를 거쳐 18세기 유득공, 정약용, 한진서 등도 낙랑군과 임둔군, 현도군이 한반도 안쪽에 있었다고 보았다. 요서설과 요동설도 제기됐으나 정약용과 한진서는 이를 모두 비판했다. 위가야씨는 “한사군 한반도설은 처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파악한 중국 사서의 주석가들 이래 조선 후기에 역사지리학을 연구한 실학자들, 그리고 일본인 역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심화되고 그 타당성을 인정받아온 학설일 뿐 일제 식민사학의 산물이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일본학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해방 후 평양에서 발굴된 유물과 국내 역사학계의 사료 연구가 축적된 결과 통설로 자리잡았다. “일제시기에 발굴한 낙랑 지역 고분의 수는 70여기에 불과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의 수는(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2600여기에 달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낙랑군 관련 유적의 대다수는 일제시기아 아닌 해방 이후에 발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학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낙랑 관련 유적 유물들 역시 주로 이 시기에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
 

낙랑군 요서설에 따른 낙랑군 위치. 학계 통설은 평양이라고 본다.

역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가 낙랑군이 중국 식민지였는지 여부를 가르는 재야사학계의 논리야말로 일제 식민사관을 답습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낙랑군의 주요 지배층이 중국인이었으며 화려한 장식을 갖춘 낙랑고분이 중국인 지배층의 무덤이었던 반면 고인돌은 고조선계 토착민의 무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이 고대부터 식민지였다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던 일본 학자들의 ‘타율성론’의 핵심 근거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는 1990년 북한에서 발견된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인구 호적을 기록한 대장)과 나무곽 무덤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등을 토대로 낙랑군의 주요 지배층 가운데 상당수는 토착민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고인돌 또한 낙랑군 시기의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도 드러냈다. 안정준씨는 “고고자료를 기반으로 한 한국 학계의 연구로 인해 낙랑군이 중국인에 의해 운영된 중국인 사회라는 오랜 통념은 깨졌다”며 “(재야사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 문제에만 천착하는 것은) 낙랑군을 근대적 식민지로 규정하며 민족 대 민족의 대립구도로 파악했던 과거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적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외국 학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까지 감수하면서 근거가 불명확한 낙랑군 요서설을 강변하지 않고도 일제 식민사관을 논파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라는 재야사학계의 단순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1990년 평양에서 발견된 호구부 목간. 낙랑군 내 현별 호구와 전체 인구가 기록돼 있다. = 역사비평 제공

■ 식민사학을 비판해도 식민사학자? 

역사학계는 50여권의 단행본을 출간하며 막강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재야사학계의 대표선수 이덕일 소장의 무차별적 ‘식민사학자 몰이’가 한계를 넘어 폭주한 사건으로 지난달 5일 최종선고가 내려진 ‘이덕일-김현구’ 소송을 꼽는다. 

이 소장은 2014년 출간한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를 18쪽에 걸쳐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이 소장은 책에서 “김현구는 와세다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최근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라는 책에서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쓴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70~80년대 민족문학론의 본산이자 진보 노선을 유지해온 창비에서 출간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어디에도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문장은 없다. 그런 해석이 가능한 대목도 없으며, 논리구조상으로도 그렇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는 일본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일본서기의 기록을 집요하게 논파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 소장은 무엇을 근거로 김현구 교수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고 본 것일까. 그는 김현구 교수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삼국과 야마토 정권 사이의 인적 물적 교류 횟수를 기록한 대목을 문제 삼는다.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일본서기>기록을 보면, 야마토정권과 신라 고구려 사이에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가 있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고 백제와는 왕복 39회의 교류가 있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야마토 정권이 삼국 및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횟수보다 삼국 및 임나가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횟수가 더 많다. 이 소장은 이를 “야마토 정권이 신라 고구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이란 뜻” “자주 조공을 바친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속국이라는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김현구 교수가 ‘표면적’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국제관계를 <일본서기>의 관점에서 보는 식민사관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현구 교수는 책에서 사신 파견 및 물적 인적 교류 횟수를 당시 삼국과 임나가 야마토 정권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로 삼고 있을 뿐 사신 파견을 ‘상국’이나 ‘조공’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관련 내용이 서술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5장의 결론은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과의 관계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백제와의 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교류 횟수로 볼 때 야마토 정권은 백제와 주로 교류했으므로 야마토 정권이 삼국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고, 임나와의 교류 횟수가 적은 것은 임나를 지배한 것이 백제였기 때문이며, 백제가 고구려 신라와 경합하는 과정에서 야마토 정권의 병력을 용병으로 썼다는 논리다. 이 소장은 이같은 김현구 교수의 논리를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재판부는 “피해자 집필 서적을 직접 읽어본 일반 국민이라면 누구나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에서 피해자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이 허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출판물에 의한 허위 사실 적시 혐의로 이 소장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덕일 소장의 책은 김현구 교수의 책을 그 이면의 논리까지 파악해 학문적으로 비판한 것”이라며 “유죄 판결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단히 위험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학을 본격적으로 재검토하거나 식민사학의 이론 체계를 해체한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지난달 23일 ‘학문의 자유와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시민모임’은 이 소장의 유죄판결에 대해 성명서를 내고 “명예훼손으로 유죄이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을 학자가 더 이상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식민사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법적 단죄의 희생양이 됐다는 주장이다. 성명서에는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박정신 전 오클라호마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 등 47명이 서명했다. 그러나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에게 유죄가 인정되는 것은 식민사학을 비판하였다는 이유가 아니라, 피해자가 주장하지도 않은 허위의 사실을 전제로 피해자를 식민사학자로 규정지음으로써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데 있다.” 한 역사전공 교수는 “동료 학자들이 김현구 교수에게 ‘선생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절대 타협하지 마시라’고 얘기했다”며 학계의 격앙된 분위기를 전했다.
 

김현구 교수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표지

■ ‘위대한 상고사’의 불길한 그림자 

세 젊은 연구자들이 <역사비평>에 글을 기고한 것은 혈기왕성한 젊은 연구자들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역사학계가 재야사학의 공격에 정면 대응하겠다고 알리는 선전 포고에 가깝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재야사학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정면 대응할 경우 오히려 재야사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정빈 경희대 연구교수는 “창조론자들의 도발에 생물학자들이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1970년대~1980년대 ‘1차 고대사 파동’에서 역사학계가 입은 상처 때문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검인정 교과서를 폐지하고 1974년 국정교과서를 배포하자 재야사학계는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을 중심으로 기존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매도하며 파상공세를 펼쳤다. 이들은 국정 국사 교과서가 단군을 신화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고 1978년 국정 국사 교과서 내용 정정 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공세적으로 주장했다. 이어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안호상 등의 청원에 의해 국회에서 열린 국사 교과서 공청회에서 이들은 단군의 역사적 실존 인정, 낙랑군 북경설, 백제의 중국 동해안 통치설, 통일신라 국경 북경설 등을 주장했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에 대한 극복이 상당 부분 이뤄졌고 교과서 내용이 사실에 충실한 것이라 반박했으나 국회의원들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해 역사학자들에게 수모를 안겼다. 

이 같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계가 정면 대응 움직임에 나서고 있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확정해 현재 밀실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국가 주도의 단일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국정화는 그 자체로 ‘역사 인식의 퇴행’이다. 이 못지않게 역사학계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의 친일 독재 미화 비판을 희석하기 위해 고대사 서술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는 쪽으로 몰고갈 가능성이다. 교육부는 이미 지난해 앞으로 중고등학생들이 배울 교과서 집필의 청사진이 되는 2015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고대사 비중을 강화하기로 확정했다. 정부가 국정화 확정고시를 발표하던 지난해 11월3일 당시 황우여 교육부장관도 “상고사와 고대사를 보강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야사학계가 역사학계 통설이 식민사관이라고 공격하고 여야를 막론한 국회의원들이 동조해 역사학계의 주요 프로젝트를 좌초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지난달 경향신문 칼럼에서 이덕일 소장을 식민사학의 희생양이라고 옹호하는 등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마저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허황된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퍼져 그냥 두고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고고학회, 고대사학회, 상고사학회는 지난달부터 정기적으로 모여 상고사 관련 쟁점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역사학계는 재야사학계의 논리가 대중들에게 먹혀 든 데는 대중과 소통하려는 학계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는 반성에 따라 대중강연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국고대사학회가 지난 9일부터 6월까지 매수 수요일 ‘한국고대사 시민강좌’를 시작했다. 조인성 경희대 교수는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기 12개 강좌를 열고 강좌를 지역으로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학계는 대중강연과 함께 올해 안에 고대사 관련 쟁점을 다루는 단행본도 출간할 예정이다.
 

■ ‘매국-애국’ 프레임의 딜레마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지난해 4월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가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과 관련해 마련한 임시회의에 출석해 이덕일 소장과 토론을 벌였다. 임 교수는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이다. 이 소장은 이 자리에서 한사군이 한반도에 표시된 점 등을 거론하며 “역사관 자체가 우리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자꾸 일본 식민주의자의 입장, 중국 동북공정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도”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넉달 후 출간한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도 이 토론을 끄집어내 임 교수를 비판했다. 그의 프레임에 따르면 임기환 교수는 매국 사학자인 셈이다.
 

지난해 9월11일 임기환 교수(가운데)가 국사편찬위원회 공청회 장소 앞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읽고 있다. = 정원식 기자

한 가지 되짚어볼 장면이 있다. 지난해 9월 11일 오후 경기도 과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역사과 편찬 준거 개발 시안 공청회’가 열렸다. 국편은 당시 교육부 위탁을 받아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개발하고 있었다. 공청회에는 집필기준 연구진 임기환 교수, 강석화 경인교대 교수, 김수자 이화여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첫 순서인 주제발표가 끝난 후 세 사람은 공청회장 문 앞에 섰다. 가운데 선 임기환 교수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다. 성명서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의 과정을 돌아볼 때, 아직 통설로 자리 잡지 못한 견해나 특정한 역사 인식을 교육 현장에 제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국정 발행 체제를 고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적지 않다”며 “만일 역사 교과서가 국정제로 환원되고, 그 내용도 학계의 정설을 담지 못할 경우 역사 교육이 감내해야 할 피해는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위탁으로 받아 집필기준을 연구한 연구진이 집필기준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화에 반대 선언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매국이고 무엇이 애국일까. 정부의 잘못된 국정화 방침에 반대했으니 애국일까. 아니면 식민사관 논리를 추종했으니 매국일까. 

이덕일 소장은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이 논리대로라면 역사학계의 원로·중견 학자들은 물론 <역사비평>에 재야사학을 비판하는 글을 실은 30대 젊은 연구자들도 식민사학에 빠져 있는 셈이다. 한국 진보세력이 종북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논리와 유사한 음모론적 가설에 가깝다. 음모론은 사회 부정의를 고발하는 비판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질문으로 남을 때 음모론은 비판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 답변이고자 과욕을 부리면 그것은 더 이상 비판이 아니게 된다. 망상이 된다. 도그마가 된다. 독백하는 신념 체계가 된다.”(전상인, <음모론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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