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 국가주의의 끈을 놓지 않는
일본을 향한 기억의 전쟁
2000년 4월, 도쿄도 지사에 선출된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당시 자위대 기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도쿄를 보면 불법 입국한 많은 산고쿠진(三國人)과 외국인이 매우 흉악한 범죄를 반복하고 있다. 큰 재해가 일어날 경우 경찰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큰 ‘소요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기대한다.”
* ‘산고쿠진’은 패전 직후 일본에 있던 재일 조선인, 타이완인 등 구 식민지 출신자를 가리켜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차별적인 용어이다.
1923년 9월 3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夫)는 각 지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신한다.
“도쿄 부근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이용해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려 하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 이미 도쿄부에는 일부 경계령이 시행되고 있으므로 각지에서는 충분하고도 면밀한 시찰을 더 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한층 더 엄밀히 단속할 것.”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공격해온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 때문에 계엄령을 발포하고 6,000여 명을 대량 학살한 관동대지진의 참상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보여준 식민지 지배심리와 타민족 차별의식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 수도의 지사라는 고위 공무원이 여전히 국민의 배외적 감정과 타민족에 대한 적의를 선동하고 있으며, 이런 차별적이고 도발적인 발언을 반복함으로써 일본의 극우파들은 계속해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그들은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에 반대하고,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죄와 국가 보상의 시행을 가장 강고하게 반대하며 국가주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현대 일본이 보여주는 국가주의의 끈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1923년 관동대학살의 처참한 현장에서 조선인 대량 학살을 배후 조종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심리와 당시 관료와 군대의 정치행태, 그들의 타민족 차별의식과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관동대학살의 진실을 규명한
최초의 단행본
8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관동대학살의 진실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외면되어왔다. 해방 후 한국정부는 관동대학살에 대한 조사와 자료제출을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으며, 일본정부도 문제를 인정하고 사죄한 적이 없었다. 국내의 관련 연구 상황 역시 열악하다. 일본 자료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하여 몇 편의 논문이 나왔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 4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인소란이란 제목의 책이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서와 자료집, 사진집 등이 편찬되었다. 하지만 진실을 규명하고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선생은 1960년대부터 관동대학살 관련 자료를 모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1975년 일본에서 초판을 출간한 뒤, 2003년에 이를 다시 수정・보완하여 신판으로 출간했다. 선생의 2003년 신판을 번역한 이 책은 국내에서 최초로 출간되는 관동대학살 관련 단행본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한층 더한다.
학살의 진실에 다가가는 생생한 증언과 기억들
그 참혹한 기억의 다큐멘터리
필자는 예리한 분석과 유려한 문제로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참혹한 기억의 현장에 다가가고 있다. 수많은 증언과 기억들을 통해 되살아나는 긴박하고 처절한 학살의 기록들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이 책에는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와 군사기록을 비롯하여 정부 고위관료의 수기, 당시의 신문 기사, 일반 시민・말단 경찰・군인의 증언 등이 현장감 있게 전개된다.
각각의 증언과 기억들은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서 학살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양한 시각과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특히 필자는 실제 학살을 자행했던 가해자의 참회의 증언과, 죽음의 공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선인들의 눈물겨운 증언들 속에서, 나라 잃은 민족이 경험해야 했던 참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당시 경찰과 군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엄령과 학살을 진행해갔는지 예리하게 읽어내며,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움직였던 제국주의의 지배심리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있다. 또한 당시의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시켜 기록했던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계엄령의 발포 시점과 조선인 관련 정책, 희생자 조사 등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한편 필자는 식민지 지배시기부터 현재까지 일본 민중과 정부 모두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재일 조선인 차별의식의 깊은 뿌리에 접근해간다. 당시 관헌의 업무지침으로 상세하게 하달된 조선인 식별자료, 조선인 감시 명부, 감시 상황, 조선인 유학생 관리 명부 등을 상세히 소개하며, 식민지 지배사상에 오염된 일본인들의 조선인 차별관은 어느 정도였는지, 관헌의 편견과 조선인 적대정책은 어떻게 현실화되었는지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또한 당시 관동 일대에 살았던 재일 조선인의 직업 구성, 생활 상태, 거주 지역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재일 조선인들의 열악한 삶의 현장에 다가가고 있으며, 그들이 학살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처절한 절규를 전해준다. 당시 조선인들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지진을 맞닥뜨린 후 언어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어두운 일본에서 동포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생명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런 조선인 집단을 보고 “조선인이 공격을 해온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일본군부의 기록에까지 등장하는 당시의 터무니없는 거짓 정보를 하나 소개한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이라고 잘못 믿어버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駒込)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결과,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불령선인(不逞鮮人:후테이센진)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항상 불평・불만을 품어 소요 등을 일으킬 염려가 있는 조선인이란 뜻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민족해방투쟁의 역사 속에서
관동대학살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 관동대학살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안과 지배 심리가 불러온 또 하나의 식민지 전쟁이었다
관동대학살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지배–피지배라는 식민주의의 섭리가 일본 본토에서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문제를 절대 비껴갈 수 없다. 동시에 조선인민의 해방투쟁과 연관짓지 않고서는 올바른 역사적 위치를 찾을 수 없다. 학살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해방투쟁의 고양은 명백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이 사건은 1910년 이후 식민지 지배와 그것을 보조했던 일본 민중이 ‘만만치 않은 적’인 조선인민에게 느꼈던 공포심이 불러온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였으며, 불행한 한·일 관계의 연장선에 놓인 필연적 귀결이었다.”
당시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 조선의 3・1민족해방운동, 간도사건(間島事件) 등을 경험하며 식민지체제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국내 정세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불안과 지배 심리를 더욱 자극해왔다. 1923년 7월에는 일본공산당이 성립되었고, 1923년 말 도쿄와 오사카에 각각 조선노동동맹회가 결성되어 전국 조직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1923년 3월 조선의열단에 대한 대탄압을 시작으로, 5월 노동절에 조선인 사상범과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 6월의 제1회 공산당원 검거 등이 이어졌다. 관동대학살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진행했던 이데올로기 말살정책과 식민지 탄압의 정점이었다.
한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권력의 중추에 있었던 관료와 군인들 중에는 일본이 식민지전쟁을 수행할 때 선두 지휘관의 역할을 했던 자들이 많았다. 필자는 이들의 식민지 경험과 마키아벨리즘이 어떻게 조선인 차별관으로 이어져 계엄령과 학살을 초래했는지 추적하고 있다. 특히 경비와 구호의 직접 책임자로서 당시 계엄령 시행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키치(赤池濃),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夫), 내무대신(內務大臣)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의 수기를 면밀히 분석하여, 계엄령 결정 과정과 이들이 계엄령의 명분으로 주장했던 ‘조선인 폭동설’의 허구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3명의 치안 트리오 중 아카이케는 3․1독립운동의 탄압 과정을 직접 경험한 총독부 경무국장이었고, 시종 그의 상사로서 함께 행동했던 미즈노는 당시 정무총감이었다.
■ 계엄령 발포 시점, 유언비어 전파공작, 자경단 활동에 감춰진 일본 정부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다
이 책은 계엄령이 발포된 시점을 추적하며 정부 관헌의 계엄령 선포 의도를 밝혀내고 있다. 이를 토대로 관헌의 수뇌부가 계엄령 포고의 근거로 들었던 조선인 폭동설과 공격설의 허구를 규명한다. 그동안 계엄령이 선포된 것은 9월 2일 오후 6시라는 설이 정착되어왔다. 하지만 필자는 계엄령의 결단을 내리고 시행 방침이 준비되고, 출병 명령을 받은 군에게 구체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하라” “실탄 30발을 휴대하라”는 등의 명령이 하달된 시점이 하루 전인 9월 1일이었음을 밝혀내고 있다. 또한 각 부대의 출동 상황과 출동 당시의 명령 등을 분석하여, 군대의 실질적인 계엄 출동이 계엄 선포보다 먼저 이루어졌음을 확인한다.
그러면 계엄령의 명분이 되었던 유언비어는 어떻게 해서 그토록 신속하게 퍼져갔는가? 필자는 유언비어의 발원지와 근원을 자세하게 추적하며, 유언비어를 메가폰이나 전령・대자보를 이용해서 대량생산한 것은 바로 관헌이었다고 주장한다. 유언비어를 권력 스스로 퍼뜨리고 부추기고 절대화시켜 다시 퍼뜨렸으며, 그것이 민중에게 퍼지는 데 권력 상부의 권위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또 조선인 살해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자경단과 군인들의 당시 활동을 자세히 기록하며 비극의 진상에 다가간다. 관헌은 일본도와 죽창・도끼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불령선인’의 폭행이나 유언비어의 위협에 대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중의 자위조직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산을 잃고 기아에 직면한 민중의 불평불만을 두려워한 관헌이 민중의 배외심으로부터 복수심을 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단체였다. 자경단이 한층 더 깊숙이 사건에 관여하게 된 배경에는 관헌의 지령이 있었다.
■ 조선민족운동사 연구에 기초를 마련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姜德相)
일반 독자들에게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은 그리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근대사를 공부하는 인문사회과학도라면 일본 식민지 지배의 근간을 보여주는 ‘강덕상 자료집’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조선민족운동사 연구에 기초를 마련한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은 일본사회 주류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사 연구자로서 험난한 여정을 거쳐왔던 선생의 평생에 걸친 연구의 결실이다. *강덕상 선생은 이 책의 발간에 맞춰 9월 20일 한국을 방한한다.
1932년 한국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메이지(明治)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동양사를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히토츠바시(一橋)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시가현립(滋賀縣立)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中公新書), 조선 독립운동의 군상(朝鮮獨立運動の群像)(靑木書店), 조선인 학도출진(朝鮮人學徒出陣)(岩波書店), 현대사자료(조선 1~6, みすず書房), 조선 독립운동의 혈사(朝鮮獨立運動の血史)(譯・平凡社 東洋文庫), 여운형 평전 1―조선 3․1독립운동(呂運亨 評傳 1, 朝鮮三・一獨立運動)(新幹社), 여운형 평전 2―상해임시정부(呂運亨 評傳 2, 上海臨時政府)(新幹社) 등이 있다. 그밖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 김동수金東洙
전남대학교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를,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한국근세사 전공)
■ 박수철朴秀哲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동양사학과에서 석사를, 일본 교토(京都)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일본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일본근세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