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비의 책         근현대사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군인에서 상인, 그리고 게이샤까지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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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사키 소지 지음 | 이규수 옮김

신국판|화보 8쪽, 본문 240쪽|12,000원

ISBN 89-7696-713-5 03910



책임편집최세정 전화02-741-6127 영업담당정순구 팩스02-74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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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역사와 전체상


일본에게 식민지란 일본 자본주의 모순의 분출구이자 생명선이었다. 이 결과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은 군인과 경찰, 관료뿐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 말단의 서민층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배구조는 지배계층의 비호 아래 이름 모를 수많은 민간인, 즉 조선에 이식된 ‘풀뿌리 식민자’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 수는 식민 지배 말기 75만 명을 넘어섰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역사와 전체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서이다. 1876년부터 1945년까지 70년 동안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일본 식민 지배의 특색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일본의 조선정책과 조선관에 조선 내 일본인이 미친 영향, 그리고 그들의 언행과 행동이 조선인에게는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살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 등의 관변단체 사료, 일제시대 지방사 자료,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전기와 회고록 등 다양한 사료를 적절히 활용해 조선 내 일본인의 성・직업・지역별 통계, 각 시기별 인구 통계와 그 변화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독자로 하여금 일본 식민정책의 특징, 그리고 시기별 역사적 사건과 인구 변화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전기와 회고록을 인용함으로써 식민시기 수많은 일본인이 이 땅 한반도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으며,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세밀하게 전달한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이 책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가 조부모와 부모의 체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담보를 획득하는 것에 있다. 물론 지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그 옛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크다.(4쪽)


이와 같은 저자 다카사키의 문제의식은 “왜 우리가 그들―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과도 연결된다. ‘가학’과 ‘피학’의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역시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큰’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국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최근 일제강점기의 일상생활과 근대, 근대의식에 대한 다양한 연구 성과물이 책으로 엮어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시공간 안에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도외시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이는 지금까지 식민정책사 연구의 경우 한국사 영역으로 간주되어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 내 일본인의 사회와 사회조직, 역사 인식에 대한 연구는 마치 일본사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는 국내의 연구 풍토와도 연관돼 있다. 그러나 식민정책을 연구하면서 식민지 지배자와 지배집단의 내부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다면 그 연구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 내 일본인에 관한 국내 연구를 촉발시키는 데 작지만 소중한 불씨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 그들은 누구인가?

―75만 일본인의 다양한 군상을 통해 본 풀뿌리 식민 지배의 실상


■ 조선 내 일본인의 성별, 직업별, 지역별 특성

개항 초기 조선 내 일본인의 인구 구성은 현저한 남녀차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을 동반한 도항이 조약 위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천지 조선’으로의 도항이 그들에겐 ‘모험’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영주를 고려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이후 여자와 아이들이 늘어났는데, 여성 중에는 유곽에서 일하는 예창기와 작부(이를 통틀어 게이샤라고도 한다)의 비율도 함께 증가했다.

개항 직후 조선으로 가장 많은 거류민을 보낸 지역은 전통적으로 조선과 관계가 밀접했던 나가사키(長崎)였다. 한국강점 이후는 지역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야마구치(山口)나 후쿠오카(福岡)를 비롯한 규슈(九州)와 주고쿠(中國) 지방이 주를 이루었으며, 식민 후기로 갈수록 관리와 경찰이 늘어나면서 도쿄와 기타 대도시 출신자들, 홋카이도(北海島)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방의 일본인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개항 초기 조선 내 일본인의 지역별 분포는 대단히 불균등해서 경기도와 경상남도가 거의 절반을 차지했는데, 이는 서울과 부산 같은 대도시에 일본인이 집중했음을 나타낸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침략정책과 군수공업화정책과 연관되어 한반도 북부 지역에도 일본인이 급증하였다. 반대로 농촌 지역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 높지 않았다.

개항 이후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은 군인과 경찰, 관료, 상인과 기업경영인, 그리고 교사와 교수, 문학자와 같은 지식인층, 회사원과 지주, 농민, 대륙낭인, 주부와 학생, 유곽에서 일하는 예창기, 작부 등 각양각색의 직업 구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주 초기에는 상인과 조선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대륙낭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거주자 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가옥을 짓기 위한 목수와 페인트칠공의 숫자도 함께 증가했다. 고리대와 전당포의 경우 통계수치보다 많은 수의 일본인이 이를 운영했는데, 이는 식민시기를 통틀어 계속 유지되었다. 공무와 자유업은 모든 시기를 통해 20~40%를 차지했다. 농림과 목축업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는 어업・제염업과 더불어 절대적인 감소 경향을 보였다. 광공업은 침략전쟁의 확대로 인해 조선의 ‘대륙병참기지’화를 추진하던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늘어났으며, 오히려 상업과 교통업이 이상할 정도로 비대한 구조를 나타냈다. 통계 자료를 보면 기타・무직・무신고 등 정체불명의 일본인이 많았다. 이는 조선 내 일본인 사회가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조선인 위에 군림하는 사회구조였음을 잘 말해준다.


■ 1876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 내 일본인들의 인구 변화 추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개항 당시 54명에 불과했던 조선 내 일본인은 1884년 말에는 4,356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 1889년에는 5,589명, 청일전쟁일 일어난 1894년 말에는 9,354명으로 서서히 증가했다. 전쟁을 발판 삼아 한탕하려는 다수의 일본인이 조선으로 건너와 청일전쟁 후인 1895년 말에는 1만 2,303명으로 늘어났다. 1900년 전후로 일본에서는 조선 이민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황무지 개척과 이주 어촌 건설이 주창되었으며, 그로 인해 1900년 말 1만 5,829명에서 1905년 말에는 4만 2,46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일본 정부는 좀더 확실한 한국 지배를 위해 조선으로의 이민을 적극 장려했으며, 그 결과 조선 내 일본인은 1906년 말 8만 3,315명에서 1910년 한국강점 직후엔 17만 1,543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급물살을 타듯 조선 내 일본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14년 말에는 29만 1,217명, 1919년 말에는 34만 6,619명, 1930년 약 53만 명, 1942년 말 약 75만 명을 넘어섰다. 이 숫자는 일본의 작은 부현(府縣) 정도의 규모였다.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당시 일본인은 북한에 약 50만 명, 남한에 약 27만 명, 그리고 만주에서 빠져나온 피난민 약 12만 명이 있었다. 북한의 수용소에서 1945년 겨울을 넘기던 일본인 중 2만 5천 명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으나 대부분의 일본인은 비교적 온건한 상태로 1947년까지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화보 3쪽 <조선 내 일본인의 인구 변화> 그래프 참조)


■ 조선 내 일본인의 생활과 조선관, 그리고 식민의식

조선 내 일본인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치안이 안정된 도시를 거점으로 생활했으며, 자기 거주 영역에 집중해서 조선인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은 조선인과는 별개의 그들만의 세계에서 조선인을 착취함으로써 귀족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에게 ‘미개인’인 조선인은 당연한 착취의 대상이었으며, 인격체가 결코 아니었다.


1908년 신마산에서 태어난 조선사 연구자 하타다 다카시는 “나는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일본인 거리에서 살면서 일본인 소학교를 다녔고 일본풍 생활양식 안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조선인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우리는 조선에 대해서 무지했다.”(79~80쪽)


대구에서 출생한 모리자키 가즈에는 1934년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쌀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했다. 주위에 농사를 짓던 일본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리자키는 나중에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썼다. 모리자키의 부친은 고등보통학교 교사였다. 하지만 “내지에서 친척이 놀러오면 우리에게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고 했다. 낡은 물건이나 불편한 것, 육체노동이 필요한 일 등은 같은 반 친구들의 집에서도 별로 본 적이 없는” 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165쪽)


이구로의 연구에 따르면 집에 ‘어머니’라 불리던 조선인 하녀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35명 가운데 26명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어머니’가 어떤 인물인지에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인격이 없는 도구, 로봇과 같은 존재”였다.(176쪽)


조선 내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해 우월한 식민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미개지’라는 이미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인을 멸시하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보았으며, 면화 재배나 철도 건설, 식림사업과 같은 일은 자신들이 베푼 시혜로 생각했다. 한때 조선을 이해하자는 내용의 책이 발간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오로지 일본을 위한 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아사카와 다쿠미와 같이 일부 조선을 이해하고 사랑한 일본인이 없던 것은 아니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일본인의 우월한 식민 의식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할 뿐 아니라 조선을 위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왜곡된 역사 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1913년 조선문우회는 조선개척지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조선사와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편견의 글로 가득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엿볼 수 있다. 즉 조선에는 “투쟁과 변란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도탄의 학정에 울고, 번번이 외적으로부터 받은 고통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동안 일찍이 재능이 뛰어난 영주가 없었다. 강한 힘과 기세를 지닌 뛰어난 인물이 이 땅 모두를 평정하고 민중을 통제하여 생명의 복리와 혜택을 만들어내는 문물의 창출을 도모한 적도 없다.” “조선인은 소년 시절에는 약간 똑똑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태만해지고 활력을 잃는다. 조혼(早婚)이라는 폐습과 온돌이 그 요인의 하나다.” “조선인 소작농 중에는……일본인의 소작인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미풍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발언은 실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내용으로 단순히 조선인에 대한 편견일 뿐이다. 특히 온돌에 대한 편견은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어 있던 말인 듯하다. 1918년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으로 복무하던 나가이 요시는 “온돌제 군인들 머리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온돌방에서 잠을 자면 모두 바보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124~125쪽)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는 잔혹했다. 가난한 달걀장사 조선인을 여러 명이 에워싸고 눈에 띄지 않게 속여 통에서 달걀을 훔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불쌍하다”고 생각한 후쿠야마 효이치도 차츰 “아아, 이 조선 놈들은 바보다. 열등하다. 이놈들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46쪽)


1902년 7월 와카마쓰 도사부로가 목포의 영사로 부임했다. 그는 미국에서 면화 종자를 수입했는데, 1904년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했다. 이는 “조선 면업 발전의 단서”가 되었다. 이후 도쿄에서 면화재배협회가 결성되어 전라남도 일원에 미국 면화 종자의 재배를 장려했다. 하지만 면화 재배에 따라 “현저히 채소와 잡곡의 산출이 줄어 농민 생활에 불편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잊어서는 안 된다.(77~78쪽)


그런데 “일본은 조선에 나쁜 일도 했지만 좋은 일도 했다. 그중 하나가 식림사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무를 심은 이유는 더욱 많은 삼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산을 녹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128쪽)


조선인의 좋은 점을 이해하고 조선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도 당연히 일본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136쪽)


■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사실의 재인식

이 책에는 우리 역사와 연관된 중요한 사실을 다수 언급하고 있다. 일례로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지원자로 삼아 군자금을 받아내고 ‘천우협(天佑俠)’을 결성한 일본인들이 니로쿠신보(二六新報)를 중심으로 뭉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과 제휴해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동학정부’를 세워 ‘한일연합’을 만들겠다는 헛된 꿈을 꾸었다거나(52쪽), 1895년 민비(명성황후) 암살사건(을미사변)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한성신보사의 사장 아다치 겐조,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 삿사 마사유키 등 사원 전원과 가인지기우(佳人之奇遇)의 저자로 유명한 도카이 산시(시바 시로)와 같은 다수의 지식인층이 주모자가 되어 조직적으로 벌인 사건이었으며, 한성에 거주한 다수의 일본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68~69쪽)이 그러하다. 또한 1900년대를 전후로 일본인이 울릉도를 불법 점령하고 조업한 사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1900년 10월 칙령을 공포해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울도군 지역에 돌섬, 즉 독도를 포함시킨다고 정했으나 이후에도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 점령은 계속되었다는 내용(83쪽)은 지금도 계속되는 독도 분쟁에 관한 역사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세 가지 유형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저자 다카사키 소지는 각 시기별 조선 내 일본인의 존재 형태를 서술한 후 그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제1유형은 자신들의 행동이 훌륭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부류, 제2유형은 순진하게 식민지 조선을 그리워하는 부류, 그리고 제3유형은 자기비판하는 부류이다.

이 책에서는 제1유형의 일본인으로 불이흥업주식회사 사장 후지이 간타로의 딸 이노하라 도시코와 수풍댐의 건설자이자 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 사장이었던 구보타 유타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대륙병참기지론을 전개한 스즈키 다케오, 경찰 출신의 야기 노부오를 예로 들고 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퍼뜨린 왜곡된 식민의식을 그대로 믿었을 뿐 아니라, 이의 확대재생산을 담당한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불이흥업주식회사 사장 후지이 간타로의 딸 이노하라 도시코는 “불이흥업의 뛰어난 업적은 일본의 조선 통치사에서 일개 민간회사가 반도의 국리민복(國利民福)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조선 실정에 정통하다고 자부한다. 그녀는 “조선에서는 잡곡의 주식화가 보통이다. 조선인은 오히려 쌀보다 잡곡을 좋아한다”라고 말한 다음, 그런데도 “일본이 조선에서 착취 정치를 시행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실정을 조금도 모르는 탁상공론의 무서움”을 개탄했다.(190쪽)


구보타 유타카는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1984년 인터뷰 차 방문한 조갑제에게 “적어도 한국에서는 나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나의 유산은 조선에 엄연히 남아 있다. 그 유산은 조선 민족에게 크게 기여할 것이다”라고 자랑했다.(191쪽)


스즈키 다케오는……“비참한 상태에 있던 조선 경제가 병합 이후 불과 30여 년 사이 오늘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룩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한국과 타이완에 대해 “따라서 배상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191쪽)


순진하게 조선을 그리워하는 제2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조선을 추억하는 일본인이다. 조선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일본인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 경성회, 인천회, 여수회, 벌교회와 같은 수많은 동향회와 동창회를 만들고 기간지와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조선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지닌 한 공간일 따름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다음 글과 같은 마음일 뿐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눈에 자신들의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의 회고담을 보면 흔히 다음과 같은 그리움이 표출되어 있다. “내게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아카시아 꽃향기 나는 경성 거리에 살 것이다. 우거진 남산 기슭의 삼판소학교에서 그리운 선생님을 모시고, 옛 친구들과 함께 배우는 길을 주저 없이 택할 것이다.”(193쪽)


제3유형의 일본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한다. 조선식민자의 저자 무라마쓰 다케시, 소설가 고바야시 마사루, 조선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다닌 모리자키 가즈에, 조선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하타다 다카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잘못된 일이며, 이러한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또한 제3유형의 일본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모리자키 가즈에는 “총독부 자료를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생활이 바로 침략인 것이다. 조선에 있었을 때는 만세사건도 몰랐다.……패전 이후 언젠가 한번은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 방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본인이 되어서 말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193~194쪽)


오랜 기간 조선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하타다 다카시의 말도 잊을 수 없다. 하타다는 “분명 일본 지배 아래 있던 조선은 당시 일본에 비해 근대화가 늦어 낙후되고 가난했다. 일본인이 주창하는 정체론과 낙후론은 그런 현실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일본의 지배가 조선의 진보를 저지한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선진과 후진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닌데도 조선의 낙후성을 숙명처럼 바라본다. 부당한 견해다. 지금 조선의 변모를 보면 과거 일본인이 주창한 정체론과 낙후론은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194쪽)


책 말미에 저자 다카사키는 이 세 유형으로 분류한 내용을 읽으면서 일본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그는 조선 내 일본인의 역사를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다시 강조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역사를 제대로 모르면 일제강점기의 역사 또한 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와 같은 과거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라 하더라도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일이다. 따라서 일본인, 한국인 그리고 동아시아인 모두 자국의 과거와 현재 역사에 책임감을 지니고, 아시아의 미래를 향해 대안을 마련해가는 제3유형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 책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그 연대의 첫걸음을 내딛는 데 필요불가분한 자양분 역할을 할 것이다.



■ 지은이_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1944년 일본 이바라기 현에서 태어났다. 도쿄교육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근현대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쓰다주쿠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편저서로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일본 망언의 계보, ‘반일감정’―한국, 한국인, 일본인, 중국 조선족―역사・생활・문화・민족교육, 검증 한일회담 등이 있다. 학창 시절부터 일본 내 조선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 인식의 실태와 식민지 거주 일본인의 의식 구조를 지속적으로 규명해왔다. 지금은 1945년 이후 한반도 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 옮긴이_이규수李圭洙

1962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도쓰바시대학 사회학연구과에서 지역사회연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근대 조선의 식민지 지주제와 농민운동(일본어판), 근대전환기 동아시아 속의 한국(공저), 근대전환기 동아시아 삼국과 한국―근대인식과 정책(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서양과 조선,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기억과 망각―독일과 일본, 그 두 개의 전후, 동아시아 근현대사,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 일본인이 본 역사 속의 한국, 해협―한 재일 사학자의 반평생,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등이 있다. 근대 일본 및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상호 인식을 규명하기 위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차례>

시작하며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사를 다룬 책들 / 세 가지 사료군


제1장 부산에 상륙한 일본인

개항에서 갑신정변까지(1876~1884)


부산의 개항 / 초기 거류민의 직업 분포 / 일본인 무역상과 제일은행 /

초기 이주민의 다양한 군상 / 원산의 개항 / 임오군란과 한성의 개방 /

세 번째 개항지, 인천 / 불법 도항자의 천국, 울릉도


제2장 높아지는 일본의 식민열

갑신정변에서 청일전쟁까지(1884~1894)


갑신정변과 그 이후 / 한성의 일본인―무역상, 전당포, 교사 /

부산의 일본인―무역상과 부동산업자 / 원산과 인천의 일본인 동향 /

방곡령사건 / 늘어나는 청국 상인 / 식민열의 고양 /

대구와 평양의 일본인 / 대륙낭인의 결집 / 갑오농민전쟁 /

일본인의 대원군 추대


제3장 전쟁 협력과 이민의 유입

청일전쟁에서 을사조약까지(1894~1905)


청일전쟁에 협력한 일본 상인들 / 종군기자와 신문 발행 /

전선을 따라 북상한 일본인들 / 일본의 이민 장려정책 /

청일전쟁 이후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 / 이오코의 광주실업학교 /

민비 암살사건의 주모자들 / 의병투쟁과 아관파천 /

늘어가는 유곽과 일본인 작부, 예기, 창기 / 거칠고 폭력적인 일본 상인 /

목포와 진남포의 개항 / 마산과 성진, 군산의 개항 / 일본인의 울릉도 점령 /

평양의 일본인 / 개성과 의주의 일본인 / ‘미개지’ 조선으로 /

초기의 이주 어촌 / 위조화폐의 주조 / 경부선과 경의선 /

러일전쟁의 준비와 거류민의 전쟁 협력 / 러일전쟁 전후 일본 상인의 진출 /

통신기관의 강제 접수


제4장 격증하는 한국의 일본인

을사조약에서 한국강점까지(1905~1910)


일본인 관리와 경찰관 / 일본인 교사 / 여학교와 중학교의 설립 /

일본인의 횡포 / 을사의병 / 간도와 회령․청진․나남․용산의 일본인 /

현이 주도한 조선 진출 / 동양척식주식회사 / 이주 어촌의 확대 /

광산 개발을 통한 부의 축적 / ‘신천지 조선’에 운을 건 일본의 하층민


제5장 식민지 지배의 선두에 선 일본인

한국강점에서 3·1운동까지(1910~1919)


한국강점 초기 일본인의 직업 분포 / 진해와 대전 / 오쿠라의 전기회사 /

와타세의 조선 전도 / 민족 차별과 계급 차별 /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편견 /

천한 일본인의 모습 / ‘경성백화파’ / 경원선과 호남선 / 쌀의 군산


제6장 ‘문화정치’ 속에서

3·1운동에서 만주사변까지(1919~1931)


3·1운동 / ‘문화정치’와 조선어 / 사범학교의 설립 / 다이쇼 데모크라시 /

관동대지진 / 융화운동의 전개 / 야나기의 조선민족미술관 / 재일 조선인 /

경성제국대학의 아베 교수 /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의 설립 / 불이흥업주식회사 /

경찰의 고문


제7장 ‘내선일체’의 현실

만주사변에서 일본의 패전까지(1931~1945)


북부 지역의 공업화 / 강요된 ‘내선융화’ / 일본인 2세의 폐창운동 /

국경의 경찰관 / 황민화 교육에 앞장선 녹기연맹 / 1930년대의 사범학교 풍경 /

‘내선공학’ 중학교와 여학교 / 국민학생의 전쟁 동원 / 루거우차오사건과 장구펑사건 /

내선결혼의 장려 / 강제 연행과 근로보국대, 그리고 창씨개명 / 조선인 위안부 모집 /

학자의 전쟁 협력 / 문학자의 시국 영합 / 초년병 오자키 /

도시의 일본인과 농촌의 조선인 / 소련의 참전


제8장 패전과 귀환

조선에서 다시 일본으로(1945~1948)


함흥의 일본인 세화회 / 흥남으로 몰려든 피난민 / 평양과 진남포의 난민들 /

경성 거주 일본인의 귀환 / 대구와 부산에서의 귀환


맺으며

제1유형 / 제2유형 / 제3유형


역자 후기


부록

조선 내 일본인 관련 연표

출전을 밝혀주는 원주 목록

참고문헌

찾아보기(인명·일반)

 첨부파일
식민지_조선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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