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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민주주의] 5-①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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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2013년 10월~11월에 역사 속 민주주의;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라는 주제로 5회에 걸쳐 진행되었던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 속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강의안을 수록한 것입니다.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5-①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5강-①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80년대 변혁운동과 민주주의 : 1980~1987


 

1. ‘80년대’라는 의미

 

‘80년대’ 라는 시기를 보는 데 어려움(혹은 난점)

 

- 이번 강의를 준비하고 대면하며 마주하는 어려움은 80년대가 ‘일괴암적’(monolithic) 시기로 인식되는 문제, 시대 체험자/비체험자 간의 자의적/편의적 해석의 가능성, 80년대가 사상과 운동으로만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의구심 등


- 그럼에도 80년대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그 이전/그 이후를 구분하는 ‘사상과 운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판단. 각성의 시대, 민족민중적 학문, 혁명의 시대 등 80년대에 대한 ‘이미 전제된 이해/해석’(先理解)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80년대의 사상과 운동이라는 ‘특이했던 시대’가 출현하고 10여년간 유지된 동력을 내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


- 80년대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는 70년대에 대한 ‘반정립’으로 80년대 ‘대안적 민주주의’를 어디/어떤 역사적 체험으로부터 도출했는가(80년 광주/사회성격/계급분석-주체)란 문제와 그 결과 제기 되었던 ‘대안적 국가’(혁명노선 및 그 소시기 전술적 형태)에 대한 문제임. 다만, 80년대에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그 자체에 대한 논쟁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어떤 대안적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과학적 판단을 위한 사회성격 논쟁에기반을 둔 계급분석와 세력배치 그리고 민주변혁을 위한 조직/정치노선이 강조된 시점


- 짧은 강의에서 모든 입장을 전부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1) (70년대와 구분되는) 80년대의 의미, 2) 80년대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재해석된 80년 광주의 문제, 3) 80년 서울역 회군에서 85년 2.12 총선 시기까지 제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 4) 이른바 ‘반미론’‘반제론’이 제기한 한반도적 차원의 대안국가 형성의 문제 그리고 5) 86년 개헌논쟁 시기제기됐던 개헌의 상 - 즉 대안적 국가권력의 형태 - 과 그 근거 등에 관해 소개하도록 함(87년 이후 논쟁과 학계에서 진행된 사구체 논쟁은 다루지 않음).

 


80년대 사상의 특성


(1) ‘혁명의 시대’ 혹은 ‘무사상의 사상의 시대’


- 80년대에 대해 각성의 시대, 계급주체가 새로이 구성된 시대(김진균) 등 의미가 부여되고 있으나 당사자, 해석자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함. 오히려 검증될 수 없는 ‘에테르’가 난무하는 시대(예: 이념적 레테르). 80년대 지식인들은 이전 시기를 ‘무사상, 무성격’이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구성한 이론, 실천에 대한 본격적 평가는유보하고 있는 상태임.


- 2000년대 들어서 80년대에 대한 남성주의, 권위주의 등 비판이 제기되었고 수용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주체들이 이것이 80년대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연원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침묵함.


- 되돌이켜 보면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만 존재했던 것은 아님(‘부상하는 사상’). 지배적인 것은 여전히 반공주의였으며(예: 유성환 - “반공국시 사건”), 미약하지만 자유주의도 공존했음. 80년대를 특정한 사상으로 ‘규정’하는 관습적 방식이 오히려 80년대 사상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함.

 
왜 8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확산 되었나
- ‘확산’은 지식인과 일부 사회운동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며, 이를 80년대 당대에 ‘대중화’라고 보기는 어려움(예: 대학, 대학생의 경우에 제한된 현상). 대학 사회도 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하게 마르크스주의가 쇄락한 것을 보면, 채 10년을 유지하지 못한 셈.


- 확산 이유로는 ‘반공주의’ ‘분단체제’ ‘80년 광주’ 그리고 현상유지적인 미국식 사회과학(근대화론, 구조기능주의 등)에 대한 반발 등 다양한 이유는 있을 것임. ‘80년 광주’가 그자체로 마르크스주의를 불러온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론과 실천의 전개과정(무장투쟁, 국가권력/조직구성 등)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함. 다만 80년 광주의 ‘제도화’는 마르크스주의 퇴조와 어느 정도 맞물리는 문제로 추정 가능함.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문제
-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내외적 비판이 이미 지나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과 억압적 국가권력,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감 그리고 지식인과 노동자의 연대가 교차하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시간’ 격차는 꽤 큰 것임.


- 하지만 이를 ‘비정상성’ ‘예외성’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일면적임. 오히려 ‘세계사적 시간대’를 한국 사회/지식인들은 경험할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해온 결과, ‘막대 구부리기’ 효과로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함.

 

- 80년대 전반이란 시간대로 보았을 때, 신군부의 등장 자체가 이전에 비해 매우 폭력적이며 그 강도가 매우 강했기에, 압도적인 폭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명료한 대항 이론이 필요했고,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마르크스주의였음.


-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실천/현실의 대안으로 자기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한국 사운동이 인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 활동가들 내부에서 CNP논쟁 등이 전개된 지 채 10년이 못되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외적 상황(현실 사회주의 붕괴)과 내적 상황(사회운동의 약화, 동원능력의 한계 - 1991년 즈음)으로 가시화됨.


-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감지한 이론의 위기와 현장 활동가(노조운동가, 조합원 등)가 감지한 상황은 ‘시간 차이’가 존재했음. 1991~93년경 노동운동 위기론이 확산되었을 시점에 대한 활동가/조합원들의 사후적 구술자료(전노협 연구, 2012)를 보면, ‘위기는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음.

 
마르크스주의를 대안으로 삼은 사회 모델
-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혹은 북한. 각각을 대안으로 사유한 맥락은 무엇인가? 하나로 수렴되거나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80년대 초반 여러 가능성이 모색된 것은 사실임.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 핀란드 역까지 등 사회주의 사회를 낭만적, 영웅적으로 그린 텍스트들이 많이 읽힘. 뿐만 아니라 87년 전후로 항일전쟁 시기 혁명적 영웅 뇌봉(雷峰) 등 혁명적 영웅주의를 모델로 한 텍스트는 흔한 독서 코스였음.


- 다만 명시적으로 대안적 사회모델을 1917년 러시아혁명, 북한 사회주의 체제로 상정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6년 사회운동 내 분파가 정립되는 즈음으로 판단할 수 있음(소위 NL/CA 구도). 그 이후 NL의 경우 북한을, CA의 경우 러시아혁명 모델(“제헌의회 소집”)을 명시화시켰고, 정치적 노선에 따라 읽는 텍스트, 사용하는 용어/개념 등이 구분되기 시작함.


- 왜 북한과 러시아를 대안으로 삼았는가는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85-86년 시점에 전자를 대표하는 ‘식민지론’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동시에 매력적이었음. 역사(항일무장투쟁), 식민지론, 품성론 등 구도는 이전 사회운동 논의 구도에서 발견하기 힘든 생경한 것이었음. 그 즈음 논의된 김일성 가짜 논쟁(서대숙), 항일무장투쟁사 등은 기존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전변시키는 효과가 존재함(마치 50-60년대 재일조선인들의 조국[祖國]에 대한 감정이 80년대 중반 한국 사회로 뒤늦게 전이된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과도한것일지 모름; 양영희 감독, 디어 평양에 등장하는 재일조선인 1세대의 멘탈리티).


- ‘금기된 것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당시 한국 지식인들은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물리력을 지닌 국가권력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이는 아마도 당연하게도 ‘성공한 사회혁명’의 모델과 사례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임. 80년대 중반 한국 지식인들에게 최초의 사회주의 모국 러시아를 모델로 사유하는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임(굳이 짜르 시기 사회경제적 조건과 한국과 유사성 등에 관해 자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임).

 


대중과 마르크스주의
- 80년대 급격히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되었다고 대중의식까지 확산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움. 87년 6월 민주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강령’(직선제 쟁취)가 80년대 대중의식의 평균치라고 볼 수 있음.

 

- 대중/대중운동 수준에서 지식인/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감/공포는 8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음. ‘노학연대’를 내세웠지만 ‘운동’ 수준에서 진행되었지 이것이 ‘기층 수준’에서 동의되고 확산되는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의 자율성을 확보한 전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함.


- 사상/운동으로서 80년대 마르크스주의(지식인)가 대중과 일상적으로 성공적으로 결합했는가는 - 지식인들의 사회변화에 대한 헌신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 차원에서 - ‘논쟁적'문제라고 볼 수 있음. 86년 5.3, 애학투련 등 사건으로 사회운동진영은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론’을 내세웠던 것임.


2. 광주, 시민군 그리고 민주주의


1989년과 2002년 5월 광주에 대한 두 가지 대담과 쟁점
- 1989년 역사비평(최장집 외, 「광주항쟁의 역사적 성격과 80년대의 반미자주화 투쟁」, 역사비평 No.5, 1989) 좌담의 주제는 광주 항쟁(가끔 “광주 사태”란 표현도 사용)을 둘러싼 ‘왜 광주인가’, ‘광주 5.15전야의 정치경제적 위기’, ‘신군부의 성격’, ‘항쟁의 한계’ 등 과 같은 쟁점이 토론됨. 토론 내용도 사회경제적 상황, 국가-상부구조상 위기 방식으로 논의됨.


- 반면 10여년 뒤 2002년 당대비평(정근식 외, 「광주20년-국가의 기억, 민중의 기억」, 당대비평 11호, 2000)의 좌담은 논의 의제가 크게 달라짐. 이는 “그 동안 많은 성취에도 우리는 많은 상실과 고통을 더 깊이 느끼고 있는지 그 괴리에 대한 성찰”이란 주제로 논의가 전개됨. 실제 <당대비평> 좌담은 대부분 80년대 학번들로 이뤄졌고[앞 좌담 중에 80년대 학번은 김민석 이외에 없음] 광주이후 20년을 맞아 질문이 멈추어진 80년 광주에 대해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주된 화두였음. 특히 국가기념일, 광주보상법 제정 이후 ‘광주의 과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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