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진전으로 헌정 질서에 따른 평화적 정권교체가 무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던 이 나라에서 역사책에서나 들어봤을 계엄이 기어코 선포되었다.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야당과 여러 비판 진영을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군을 동원해 ‘척결’ ‘처단’ ‘수거’함으로써 대통령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한 전형적인 친위쿠데타, 즉 내란이 발생한 것이다.
40여 년 만의 계엄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계엄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정권과 군에 의해 계엄이 검토되었다. 기무사령부(현 방첩사령부)는 ‘계엄 검토 문건’과 이를 구체화한 ‘대비계획 세부자료’를 작성하기까지 했다. 기무사의 계엄 준비 실상이 폭로된 2018년 『역사비평』은 「계엄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책머리에’(124호) 글을 통해, 시민사회가 계엄을 망각한 사이 정권과 군은 계엄을 계속 추억해왔으며 이에 근거해 계엄을 준비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나아가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한국 현대사의 부정적 유산들이 그것을 추억하는 이들에 의해 부활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음을 함께 지적하였다. 불행히도 이러한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계엄이 추억으로 그치지 않고 2024년 끝내 부활한 것이다.”
계엄의 망령이 살아 돌아왔다
―역사로 돌아보는 12·3 계엄사태
『역사비평』 150호에서는 12·3 계엄사태를 역사적으로 돌아보는 특집을 긴급하게 기획했다. 먼저 한국 현대사 속 계엄의 역사를 3개 국면으로 나누어 각각 살펴보았다. 강성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와 한국전쟁 당시의 계엄을 다뤘다. 이를 통해 계엄이 대한민국의 시작 단계부터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량 폭력을 정당화하며, 나아가 헌정 질서를 잠식하는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밝혔다. 권혁은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부터 1972년 유신 선포 때까지 계엄을 선포하고 이를 정당화한 논의 지형과 인식, 그리고 군 동원이라는 계엄의 물리적 구조가 조금씩 변화했고 그것이 실제로 계엄의 실천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노영기는 12·3 계엄사태 이전 가장 최근 사례인 1979년 부마항쟁, 10·26사태, 그리고 1980년 5·17쿠데타와 5·18항쟁 당시의 계엄을 다뤘다. 그리고 당시의 경험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커다란 ‘학습효과’로 각인됐으며, 그 결과 12·3 계엄사태 때는 비상계엄을 해제시킨 뒤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시킬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 같은 한국의 계엄과 비교를 위해 김봉준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간 계엄이 지속했던 대만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대만에서 장기간 유지된 계엄은 국민당 체제의 이식과 연장을 의미했으며, 장개석 개인의 권력기반을 확립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계엄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자 역사적 맥락에서 국가긴급권과 예외상태 문제를 분석한 논문들도 함께 수록했다. 이상록은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으로 헌법학자 한태연과 갈봉근에 주목했다. 국가긴급권 이론을 활용해 기존 헌법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헌법 질서의 정립을 시도함으로써 독재를 정당화했던 그들의 행적과 논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 신동규는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 이론을 통해 인민주권의 위기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18세기 프랑스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인민주권 파괴 시도 행위를 심판했던 초법적 논리, 곧 예외상태를 단죄하는 데 필요한 또 다른 비상조치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했다. 인민주권을 침해한 행위는 예외상태 규정을 통해 처벌이 가능하며, 이것은 결국 주권을 가진 자의 결단이라는 주장이다.
스포츠를 통해 냉전과 전후 질서를 재해석하다
―냉전과 스포츠
이번호부터 새로운 연재기획 ‘냉전과 스포츠’를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국제질서는 냉전으로 변화되었다. 냉전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같은 열전을 포함한 정치적·군사적 적대를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비군사적 적대는 물론 데탕트 이후 두드러진 적대 간의 교류 협력 등 다양한 양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후자와 관련해 스포츠는 매우 주목되는 주제다. 냉전 시기 양 진영 간 체제 대결이 스포츠에 투영되면서 스포츠가 전쟁 동원이나 전시 작전과 유사하게 수행되기도 했다. 스포츠를 통해 냉전과 전후 질서를 재해석해보는 것, 그것이 ‘냉전과 스포츠’ 연재기획의 의도이다.
‘냉전과 스포츠’ 연재기획의 시작은 심희찬이 열었다. 그는 일본의 국민적 행사로 자리 잡은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이른바 ‘고시엔(甲子園)’을 단순한 학생의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냉전의 억압 속에서 패전의 기억을 애도하는 국가적 의식의 하나로서 분석했다. 이어 오제연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서 발생한 ‘소련 붐’과 ‘반미’ 현상이 한국인들이 냉전 구도를 다르게 보고 객관화 상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오랫동안 한국에서 굳건히 자리 잡았던 친미 반공의 냉전 이분법을 해체하는 시작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렇게 ‘공공역사한다’
―공공역사의 다양한 시선과 실천들
이번호에는 공공역사와 관련한 기획을 2개 마련하였다. 하나는 이전부터 계속 연재해온 ‘공공역사의 다양한 시선들’이다. 정무용은 작년에 개봉한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분석했다. 그는 이승만을 선양하기 위해 만든 이 영화가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뉴라이트 사관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며, 실제로는 미국을 찬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하나의 기획은 2024년 전국역사학대회 당시 공공역사문화연구소가 주관한 패널 ‘우리는 이렇게 공공역사한다―한국 공공역사 실천의 사례’다. 당시 5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중 이번 『역사비평』에는 근현대 여성의 삶을 지역 공간에서 재현한 ‘길’ 작업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탐구한 이지원의 논문을 실었다. 이 작업은 여성의 역사를 역사 전체 이야기(whole story)로 해석하고, 시대 전환기 여러 제약 속에서 살아간 인간 여성의 역사를 재현하여, 있는 그대로 인간의 모습에 공명하고 젠더감수성을 높이는 이야기로 재현하고자 했다. 최근 관심이 커지고 있는 공공역사가 역사의 대중화라는 『역사비평』의 지향과 궤를 같이하는 만큼, 앞으로도 『역사비평』은 공공역사의 이론과 실천을 다룬 다양한 형식 및 내용의 글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여성성과 전문성 사이에서, 여성이 경험한 근현대 직업세계
―근현대 여성의 일과 직업
근현대 젠더사와 노동사의 결합을 모색한 이 기획의 첫 논문에서 이아리는 일제 식민지기 당시 새롭게 등장한 가사사용인이라는 직업 범주를 통해 여성의 노동이 근대 직업으로 전환되고 인식되는 과정 및 그 의미를 검토하였다. 농촌 출신 미성년 여아들에 의해 수행된 이 일은 미약한 급료, 고용 기간과 업무 내용의 불명확함, 인적 관계의 예속이라는 근대 직업과는 거리가 먼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필자는 이러한 특징이 전근대성의 지속이 아니라 여성이 경험한 근대의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진 논문에서 조민지는 대면 서비스 노동에 교차하는 여성성과 전문성 사이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으로서 1960~70년대 간호노동에 주목하였다. 당사자를 포함한 의료현장의 이해관계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때로는 간호노동자의 여성성을, 때로는 전문성을 활용했다. 그리고 필자는 돌봄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온존하는 상황에서는 간호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책머리에] · 계엄의 부활 / 오제연
[특집] 역사로 돌아보는 12·3 계엄사태
· 대한민국 태초에 계엄이 있었다, 1948~1952 / 강성현
· 계엄이라는 ‘체계'의 형성, 1952~1972 / 권혁은
· 독재의 연장, 1979~1981년의 계엄 / 노영기
· 대만의 계엄―계엄 체제의 고착과 장기화가 남긴 상처 / 김봉준
· 예외상태 법 이론으로 쿠데타 세력에 동조한 법학자 다시 읽기 / 이상록
· 2024년 비상계엄, 인민주권의 파괴 시도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주권의 소재를 둘러싼 정당성에 대한 역사인식을 위하여 / 신동규
[특별기고] · 역사적 지속성의 선구자―카터 에커트의 한국 근대사 연구 / 김마이클
[연재기획] 냉전과 스포츠 ①
· 고시엔이라는 의식(儀式)에 관한 소고―패전의 기억을 다스리는 그라운드의 청춘들 / 심희찬
· 1988년 서울올림픽의 ‘소련 붐’과 ‘반미(反美)’ / 오제연
[연재기획] 공공역사의 다양한 시선들 ④
· <건국전쟁>과 기억 전쟁―역사 부정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탄생 신화’ / 정무용
[기획] 우리는 이렇게 공공역사한다―한국 공공역사 실천의 사례 ①
· 공공역사로서 여성의 문화적 기억공간 만들기 / 이지원
[기획] 근현대 여성의 일과 직업
· 여성의 일이 근대 직업이 될 때―일제하 ‘가사사용인(家事使用人)’ 범주를 중심으로 / 이아리
· 여성성과 전문성의 딜레마―1960~70년대 보건의료 현장의 간호원 면허와 돌봄노동의 지위 / 조민지
[역비논단]
· 피해자와 가해자의 비대칭성은 극복될 수 있을까―베헤이렌(ベ平連)의 아시아·제3세계 연대에 묻다 / 노슬기
· 유엔사 규정과 비무장지대 대성동 주민의 생활공간―2세대 주민의 구술생애사를 중심으로 / 한모니까
[서평]
· 첨예한 국경사 연구에서 한·중 학계를 잇는 가교(이화자, 『백두산정계와 간도문제 연구』, 혜안 2024) / 배성준
· 한국 근대 민중에 대한 종합적 연구(왕현종, 『민중을 바라보는 방법―한국 근대 민중의 성장과 민중 인식의 편차』, 소명출판, 2024) / 김헌주
· ‘식료제국’ 일본과 ‘식료식민지’ 조선의 사이에서(임채성, 『음식조선―제국이 재편한 음식경제사』, 돌베개, 2024) / 최은진
· ‘호응’하는 자들의 공투(共鬪)와 ‘인민/대중’의 발견(마쓰시타 류이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1974~75년 일제전범기업 연쇄폭사건 』, 힐데와소피, 2024) / 심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