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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박헌영 일대기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018


이정 박헌영 일대기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편
임경석(성균관대 교수) 저 / 역사비평사 / 560쪽 / 20,000원 / 신국판 양장본


1. 왜 이정 박헌영의 생애를 복구하고자 하는가?
­은밀한 기억을 역사 속으로 불러내어 역사의 화해를 추구하고자 한다.

해방 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그룹의 통합정당인 ‘남조선노동당’을 이끌고 월북하여 북한정권 수립과 ‘조선노동당’ 창건의 한 축을 이룸으로써 남한에서는 극좌파 정당을 이끈 공산주의자로서 그 객관적인 평가 자체가 거부되어왔다. 또한 북한에서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미 제국주의 간첩 및 국가전복 음모”로 박헌영과 남로당 출신의 공산주의자가 ‘숙청’됨으로써 공식적인 북한 역사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이처럼 박헌영과 그가 이끌던 이른바 ‘국내파 공산주의자’는 남과 북의 공식 역사에서 추방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버렸던 것일까?

어른들 손잡고 남의 집 제사에 따라간 밤에도 (해방 후의 시국담)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한쪽 구석에 앉아 기나긴 제사 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까무룩 잠들곤 했다. 음식을 나눠먹기 시작할 때쯤 잠든 어린애를 깨우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의식을 찾을 양이면, 귓가에 어른들의 얘깃 소리가 웅성웅성 들렸다. 그런 때에도 박헌영이란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연배의 다른 사람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모른다. 내가 자란 곳이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겪은 지방이었기 때문일까? 어른들의 목소리 낮춘 수군거림 속에서 빨치산, 남로당이란 단어와 함께 그의 이름을 들었다.

이렇게 저자 임경석은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한 어린시절의 은밀했던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저자는 어린시절 그의 은밀했던 경험이 여수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박헌영과 남로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내파 공산주의자’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로 공포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은밀하게 그 시절을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이제 그 은밀했던 공포의 기억을 역사 속으로 부활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남한에서 새로운 혁명을 선동한다거나 북한의 체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알다시피 이미 전통적 맥락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은 그 역사적 정당성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고, 박헌영은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도 추방되어 반역자로 치부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박헌영과 국내파 사회주의자의 경험을 역사 속으로 불러내는 것은 새로운 사회혁명의 선동이나 북한체제의 옹호와 아무런 관련을 가지는 작업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경험과 기억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좌파운동의 경험과 그 기억을 불러내는 일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상의 기억을 재구축”하고, 잊혀져온 ‘공포’를 탈색시켜 사회의 화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헌영 일대기”의 출간을 우리는 “역사의 화해를 위한 손짓”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공포스럽고 은밀했던 일상의 기억을 역사의 저편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불러내어 화해하는 작업에 일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2.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어떻게 해서 집필되었는가?

오는 6월 발간예정으로 현재 마지막 편집작업을 진행중인 ꡔ이정 박헌영 전집ꡕ은 지난 1993년에 편집작업을 시작하였으므로 자료수집과 편집에만 만 11년이 소요되었다. 전체 9권으로 기획된 ꡔ전집ꡕ 가운데 마지막 9권이 이 ‘박헌영의 연보’이고, 그 연보작업의 성과를 대중들에게 미리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책이 바로 이 ꡔ이정 박헌영 일대기ꡕ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원래 전집에 수록될 박헌영의 연보로 집필된 것이다.
참고로 ꡔ이정 박헌영 전집ꡕ의 구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헌영의 저작 3권 : 제1권 일제하 저작 / 제2권 미군정기 저작 / 제3권 북한시기 저작
관련 자료 4권 : 제4권 일제하 관련 자료 / 제5, 6권 미군정기 관련자료 / 제7권 북한시기 관련자료
증언 회고자료 등 1권 : 제8원 관련자나 가족 등의 회고, 증언자료
연보 1권 : ꡔ이정 박헌영 일대기ꡕ

전집을 편집하면서 연보를 편찬하고자 했던 원래 의도는, “연구자들에게 편리”하고 객관적인 연보를 재구성함으로써 박헌영과 사회주의운동 연구에 도움에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월일과 행적만을 소개하는 간단한 연보가 아니라, 매 항목마다 근거 구절을 인용하고 출전을 밝히며, 부연설명이 필요할 때는 논평도 다는 방식의 상당히 자세한 연보를 편찬하고자 했다. 이는 역사연구자들과 인문․사회과학계의 다른 연구자들과 문필가들 그리고 박헌영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연보를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3.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가진 특성은 무엇인가?

1) 새로운 자료 발굴과 해석의 성과 위에 구축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좌파운동이나 박헌영에 대한 서술은 일제 경찰이나 미군정 경찰의 취조기록이나 정보 자료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거나, 박헌영과 대면한 적인 몇 번이나 될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의 증언이나 회고에 주로 의존해왔다. 특히 냉전시대 반공주의자들의 악의에 찬 기록이나 남로당계열 숙청 이후 그를 미국의 간첩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경우에도 공평함을 견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집 편집작업에서는 운동 당사자의 자료나 북한이나 舊소련 등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발굴하는 데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전집 편집작업이 10년 이상을 경과하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舊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새로운 자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자료를 철저히 검색하여 관련자료를 대거 발굴하였으며, 박헌영의 딸(박 비비안나)이 소장하고 있던 박헌영의 편지나 학습문건들을 발굴하게 되었다.

1994~1996년 2년 간의 모스크바 체류 기간 동안에 나는 기대 이상의 행운을 맛보았다. 문서보관소의 문서철 속에서 60-70년 전에 작성된 박헌영 관계 각종 기록들을 목도하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생생함이라, 그 감격이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박헌영뿐만이 아니었다. 분단체제 하에서는 남한에서는 빨갱이란 이름으로,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란 이유로 아무도 돌어보지 않던 사람들의 혁명운동 족적들이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졌다. 이 자료들은 운동 전개 과정의 구비구비에 얽힌 그들의 고뇌와 격정, 생각과 숨결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저자 임경석은 코민테른 자료를 처음 대하면서 가졌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마 냉전기간 동안 접할 수 없었던 다른 새로운 자료들은 접하는 감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 동안 국내에 소재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각종 자료들을 철저히 찾아내어 꼼꼼히 검색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가족들과 관련자들의 증언도 많이 수집하려고 노력하였음은 물론이다. 박헌영 일대기는 이런 자료들의 축적과 새로운 해석 위에 구축된 성과이다.

2) 이정 박헌영의 생애와 한국사회주의운동의 공백을 상당부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가) 사랑하는 내 딸. 먼 한국에서 네게 안부를 전한다. 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한히 기뻤다.

나) 박아, 박군아, ××(헌영­인용자)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홀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1991년 10월 박헌영의 생존한 두 혈육이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모스크바에서였다. 소련 해체 이후 서울과 모스크바 사이의 교통이 열리자마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한 사람은 비비안나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이복동생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려 원경이었다. 64세의 비비안나와 51세의 초로에 접어든 스님은 서로 첫대면이었다. 남매는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서로 눈을 들여다 보았다. 방울져 떨어질 듯 눈물이 그득했다.

다) 당시 경성꼼그룹에서 활동하던 정태식(鄭泰植)이 어머니의 오촌 당숙이에요. 정태식은 경성제대 법학부를 나와 적색노동자 그룹, 공산주의자 그룹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는데, 감옥에서 아버지와 알게 되었죠. 출옥 후에는 경성꼼그룹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거죠. 외할아버지는 포수로 아들 둘, 딸 둘이 있었는데, 막내가 어머니예요. 그때 어머니와 결혼시키려고 외할아버지가 봐 둔 사람이 하나 있었대요. 박씨 성을 가진 목수였는데, 학교 같은 건물을 맡아서 설계하고 지을 수 있었다니까, 젊은 사람치고는 대단한 목수였다고 해요. 그런 상황에서 사촌동생인 정태식이 찾아와 사람이 필요하니 시집보내기 전까지 신학문도 가르칠 겸 딸을 맡겨달라고 해서 어머니를 서울로 데려갔답니다. 서울 와서는 아버지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귀한 분이 오실 텐데 그분의 의식(衣食) 일체를 맡아서 해달라, 음식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통하지 말고 직접 하고, 누가 찾아와도 그 분과의 관계는 절대로 말하지 말고 하는 식으로, 역시 꼼그룹에서 활동하던 이순금(李順今)이 어머니를 교육시켰다고 해요.
그러다가 다시 정태식이 청주로 데리고 내려갔답니다. 아버지하고는 서원경에서 처음 만나는 거죠. 서원경은 청주의 옛 이름인데 어머니는 서원경이라는 이름을 아버지한테서 배워서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난 시기를 1939년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눈은 안왔지만 매우 추웠을 때라고 해요. 겨울이 닥쳐오는데 두툼한 옷을 입고 머리는 밤송이 같은 사람이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 꾀죄죄한 사람을 이정 선생님이라고 불렀답니다. 처음에는 이춘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이정 선생님이라고 불러 아버지의 성이 이씨인 줄 알았답니다. 1941년에 청주로 내려온 후에야 이순금이 아버지 함자를 처음으로 제대로 가르쳐주었답니다.
이때의 생활이란 게, 간혹 사람들이 와 있으면 어머니는 바깥에 나가서 누가 오는가 살펴보고, 준비할 것 있으면 준비해 주고 하는 식으로 살았다고 그래요. 청주에서 한 40일 생활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1년 가까이 지냈답니다. 그러니 만나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그런 것은 아니예요.
위의 인용자료들은 박헌영이 쓴 편지, 박헌영에 대해 쓴 문학작품, 새로운 사실의 발굴과 증언이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가) 1946년 2월 박헌영은, 1932년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면서 ‘육아원’에 남겨두고 왔던 딸 비비안나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녹아 있다.
나) 1927년 박헌영이 정신이상으로 출옥하였을 때, 상해에서 같이 혁명활동을 하던 그의 친구 시인이자 소설가 심훈은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선’ 박헌영을 보고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썼다. 여기에는 심훈의 박헌영에 대한 애정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절절이 녹아 있다. 또한 상해시절 박헌영 김단야 등과 같이한 혁명활동을 회상하면서 심훈은 ꡔ동방의 애인ꡕ이라는 소설을 조선일보에서 연재하였다. 하지만 그 소설은 일제의 검열에 걸려 연재를 마치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다) 대한 불교조계종의 승려 원경은 박헌영과 이른바 하우스키퍼(housekeeper, 일제하 좌파운동가들의 지하활동을 숨기기 위해 부부를 위장해서 같이 생활하던 사람)였던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박헌영의 아들이다. 원경 스님의 생모와 원경 스님의 증언을 발굴함으로써 박헌영의 출생과 숨겨진 이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이는 박헌영에 관한 이번 작업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든 보기의 부분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공식 자료뿐만 아니라 편지, 문학작품, 증언 등도 모두 중요한 자료로 발굴하여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 ꡔ일대기ꡕ는 이런 성과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3) 좌우 양극단의 편향된 평가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일제하, 미군정기, 북한시기 등으로 나누어 집필한 ꡔ일대기ꡕ는 철저하게 좌우의 편향된 평가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평가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관련 항목에 인용해놓았다. 예를 들어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을 때 박헌영이 정말 정신이상의 상태였느냐, 아니면 그를 가장했느냐 하는 점은 계속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균형되게 서술하고자 하였다.
해방 이후 박헌영과 조공-남로당의 노선과 관련해서도 노선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하지만 자료를 정밀하게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일방적인 평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모든 관련자료를 객관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하였다.
북한시기의 ‘미제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북한시기의 1차 자료는 거의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객관적 평가를 위한 기초작업만을 서술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명확히 편향된 것으로 보이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일대기에는 독자들이 참고로 삼을 수 있도록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4. ‘이정 기념사업회’의 현재

1993년 시작된 ꡔ이정 박헌영 전집ꡕ의 편찬을 계기로 출범한 것이 이정기념사업회이다. 이전 10여 년 동안은 “이정 박헌영전집 편집위원회”가 주도하여 전집 편집을 진행해왔으나, 전집 출간을 계기로 이정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기념사업회 결성의 가장 큰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말미암는 것이다. 한편으로 전집 편집작업이 아직 미비하다는 각성과, 다른 한편으로 이 때문에 후속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국내 자료뿐만 아니라 舊소련의 원자료가 아직 속속 발굴되고 있으며, 북한과 중국의 원자료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발굴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전집과 일대기에 반영되지 못한 자료가 아직 많이 발굴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 기념사업회 출범의 가장 큰 이유이다. 이에 더하여 전집으로 묶어놓은 자료를 평가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관련 학계에서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도 다른 한 이유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정기념사업회에서는 해석과 평가작업을 본분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기념사업회에서는 관점이 다른 연구성과라도 과감히 지원할 예정이다.

5. 저자 소개

ꡔ일대기ꡕ를 집필한 임경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은 ꡔ한국 사회주의의 기원ꡕ(역사비평사, 2003)을 펴낸 바 있는 소장 연구자이다. ꡔ기원ꡕ은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던 이들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회주의를 수용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등을 조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이념이 한국 역사에 처음 출현하게 된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내용의 방대한 책이다. 그 책을 보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 전후, 그러니까 거족적인 항일운동인 3․1운동에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서 선택한 길이었다. 그 운동의 한 가운데 오늘의 이 책에서 말하는 ‘박헌영’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1993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쓰자마자 ꡔ일대기ꡕ의 집필을 권유받은 그는 평소 빚에 쫓기듯 글쓰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이 청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자신이 접한 박헌영 관련 저작들이 대개 그 敵對者가 생산한 증거와 기록에만 의거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적대적 입장에 선 사람들과 박헌영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충된 기록들을 낱낱이 점검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련 연구자들에게 “쓸모 있고 편리한 연보”를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6. 남은 이야기

이렇게 1차 완성된 초고는 200자 원고지 1,500매였다. 애초 예상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분량이었다. 그 후 초고는 처음보다 더 긴 두 차례의 수정기간을 거쳐 2,000매에 달하는 책으로 완성하였다. 두 번이나 크게 수정된 배경에는 새롭게 속속 입수된 자료들 덕이었다. 특히 소련 해체 이후 모스크바에서 방대한 분량의 ‘코민테른 문서’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혁명가 박헌영의 생애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은 기본적으로 관련 연구자들을 위한 서지적 성격의 연보이다. 그러나 굳이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거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어볼 만하다. 박헌영이라는 인물도 서양의 ‘체 게바라’에 못지 않은 열정적이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니까. 이런 분들에게는 특히 ꡔ일대기ꡕ의 앞/뒤에 실린 ‘프롤로그’와 ‘부록’을 먼저 봐주시기를 권한다. 모스크바에 홀로 남겨진 채 고아처럼 자란 딸(박비비안나)에게 박헌영이 15년 만에 보낸 편지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와 해방과 분단 그리고 긴 냉전의 땅이었던 한국에 홀로 남겨진 아들(원경 스님)이 증언하는 ‘60년 세월’을 담은 ‘부록’만으로도, 한국 근현대 역사와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비극성, 그리고 박헌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像이 충분히 감지될 수 있으니까.

** 책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역사비평사 김윤경(TEL. 741–6125)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ꡔ이정 박헌영 일대기ꡕ의 구성

프롤로그­15년 만에 딸에게 쓴 편지 / 이별 / 너는 알고 있는지? / 두 혈육

제1부 일본 제국주의와의 사투
1. 출생․성장
2.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
3. 3․1운동 체험과 망명
4.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5. 첫번째 투옥
6. 다시 맡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7. 두번째 투옥
8. 탈출․망명․모스크바
9. 잡지 ꡔ콤무니스트ꡕ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0. 세번째 투옥
11. 경성콤그룹과 박헌영

제2부 해방 후 남한에서
1. 조선공산당 총비서
2. 민족통일전선을 위하여
3.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정책
4.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국면
5.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6. 전술 전환
7. 체포령

제3부 북한에서
1. 월북
2.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3.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국면
4.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
5. 한 민족 두 국가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7. 한국전쟁과 박헌영
8. 실각․재판․처형

에필로그

<부록>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 대담:혁명과 박헌영과 나
원경 스님 생모 구술
주세죽 관계자료
아버지․유년기에 대한 회상 / 박비비안나

 첨부파일
박헌영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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