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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역사학은 왜 위험한가? (경향신문 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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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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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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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사이비역사학은 왜 위험한가?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우려하는 서울대 교수모임’ 대표자들이 지난해 10월 28일 오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왜곡된 고대사 인식의 ‘사이비역사학’과 정치권 입김 들어간 ‘국정교과서’


 

“한민족이 건국한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 이전의 환국이다. 환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반을 지배하는 대제국이었다. 고대 중동의 수메르 문명의 정체도 환국 12연방 중 일부인 ‘수밀이국’이다. 한글의 기원은 기원전 22세기에 만들어진 고조선의 ‘가림토 문자’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문자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청의 건국자 누르하치는 신라의 후예다. 누르하치의 성이 아이신지오로(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는 뜻’이다. 이 진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식민사학의 후예들이 한국의 역사학계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의 후예들이 한민족의 위대함을 숨기고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한국사의 숨겨진 진실’, ‘진짜 한국사’ 등의 이름으로 전승되던 내용이다. 근거가 불분명해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재야역사학’ 등으로 불리며 1980~1990년대에 크게 유행했으나 2000년대를 거치며 예전보다 인기를 잃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사료나 논문에 접근할 기회가 늘었고,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논쟁에 참여하게 된 영향이 컸다. 황당무계한 내용을 담은 고대사에 심취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환빠’라는 표현도 만들어졌다. 

고대사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역사학계가 포문을 열었다. 지난달 말 출간된 계간 <역사비평> 봄호는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기획물에서 세 편의 글을 실었다.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매도하고, 고대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의 영토와 영항력을 강조하는 주장을 ‘파시즘’에 근거한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경량 강원대 강사, 성균관대 박사과정인 위가야씨, 연세대 박사과정 안정준씨 등 30대 연구자 셋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사이비 역사학’이 ‘철 지난 유행’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지속돼 학계와 시민사회의 건강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계기는 지난해 말 중등 역사교과서 국정화 전환과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사 지도 중단 사태다. 

박태균 <역사비평> 편집위원은 “국정교과서는 고대사와 근현대사 서술에서 사회적 논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박 위원은 “(고대사와 관련해)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이 역사적 고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름하에 일부 국회의원들과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까지 얻고 있다”면서 ‘사이비 역사학’의 영향으로 왜곡된 고대사 인식이 교과서 문제뿐 아니라 한·중관계와도 관련될 것으로 내다봤다. 

학계의 우려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고대사에 관한 일부의 주장에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비판은 타당한지 <역사비평>의 글을 중심으로 짚어봤다.
 

국정교과서의 시작과 사이비 역사학의 양지화

유신 2년째인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정부는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학생들에게 주체의식과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역사교육의 획일화를 우려하며 학계와 교육계에서 반대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밀어붙였다. 이듬해 국정 역사교과서가 교육현장에 배포됐다. 의외의 인물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공개 비판하고 나섰다. 재야 역사단체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안호상이었다. 

안호상(1902~1999)은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파시즘이 유행하던 시절 독일에 유학해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 그는 나치의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와 유사한 ‘학도호국단’을 제의한 인물이었다. 국사교과서를 비난한 이듬해인 1975년에는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해 공개적으로 역사학계를 비난했다. 1978년에는 국가를 상대로 국정 국사교과서 내용정정 청구소송까지 벌였다. 

안호상은 국정 국사교과서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고조선사를 서술하면서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 단군왕검은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라고 서술한 부분을 문제 삼았다. 안호상에게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자 숭배해야 할 존재였다. 국사찾기협의회는 한자는 한국인이 만들고, 공자와 맹자는 배달겨레의 후손이며, 백제는 400년간 중국 중남부를 통치하고, 공주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왜곡시키기 위해 미리 위조품을 묻어둔 조작이라고 당대 주류 역사학계를 몰아붙였다. 역사학계 10개 단체는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장은) 한국문화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안호상의 주장은 더욱 과감해져 ‘일제가 고조선사 1000년을 삭제했다’, ‘통일신라의 국경은 한때 베이징까지였다’, ‘신라, 백제, 고구려가 일본문화를 건설했다’는 주장까지 나갔다. 

역사학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장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군사정권과 국회의원들의 비호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 초인 1981년 11월 국회 문공위원회는 국사교과서 공청회를 열어 안호상과 역사학자들의 양자 토론을 붙였다. <경향신문>은 1981년 11월 27일자에 “청원인(안호상)보다 피청원인(역사학자) 측이 보다 조직적이고 합리적”이었다고 평했다. 반면 국회의원들은 고압적 자세였다. 임재정 의원(민한당)은 “국회를 대하는 태도가 돼먹지 않았다. 그런 태도로 역사 연구를 한다면 결과를 안 보아도 뻔하다. 이런 자세를 고쳐주기 바란다”는 말까지 했다고 기경량 강사는 기고한 글 ‘국사교과서 파동’에서 전했다.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장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기경량 강사는 <역사비평>의 글에서 “일제가 강제한 한국사의 열등성을 부정하고자 고대의 우리 역사를 반도가 아니고 대륙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그릇된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있지만, 일제강점기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거대하고 강력한 조국’을 그려보는 일은 달콤하고 유혹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사이비 역사학자의 면면을 뜯어보면 일제강점기 군수를 지낸 문정찬 등 오히려 체제순응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지적했다. 서강대 사학과 출신 소설가 이문영씨는 2010년 자신이 쓴 <만들어진 한국사>에서 이 같은 고대사 인식에 대해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는 나쁘고, 한민족의 타 민족 정복은 좋아하는 전도된 제국주의”라고 평했다. 

해방 후에도 사이비 역사학이 인기를 끈 것은 정부의 파시즘적 성향과 재벌 등이 후원한 영향이 크다.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재야학계의 주장은 1980년대 군대 정훈자료에도 실렸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마산·창원의 노동운동에도 타격을 입혔다. 전두환 시절 보안사령관을 지낸 인물이 경남 산청에 다물연구소를 세워 ‘자본과 싸울 때가 아니다’라며 노조 간부들을 회유하고 끝내 노조를 와해시켰다”고 설명했다. 구해근 하와이대 교수도 2002년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1990년대 노동운동을 약화시킨 것이 ‘다물 민족주의’라고 지적한다. 

기 강사는 <역사비평>에서 “안호상은 국정교과서의 시스템이 아니라 내용을 비판했다. 안호상이 왜 197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은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한 데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국가가 제시한 특정 역사 해석에 독점적이고 우월한 권위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국사’의 단일화가 히틀러와 동시대에 살아본 적이 있던 파시스트 안호상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자신이 믿는 역사관’을 ‘국사화’하겠다는 욕망을 심어준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국정교과서 국정화가 파시스트들에게는 마음대로 활동해도 좋다는 일종의 신호였던 셈이다. 1974년을 계기로 일제강점기 우울한 판타지였던 ‘위대한 고대사’에 대한 집착과 ‘음모론’은 양지로 거듭났다. 

1931년 평양 대동군 남정리 낙랑고분 발굴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동북아재단 역사지도 논쟁과 국정교과서

“조지 포먼하고 무하마드 알리가 권투시합 해가 내가 알리 응원하는데 김일성이도 알리 응원하모 내 국보법 어긴 깁니까?”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송강호)의 대사다. 공산권에서 자주 읽히는 저작물을 읽었다는 이유로 이적행위자로 몰아붙이는 공안당국의 논리를 풍자한 것이다. 똑같은 논리구조가 지난해 국회에 등장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사 지도 제작’ 사업이다. 

2015년 3월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도종환 의원은 동북아역사재단이 2019년 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인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서기 120~130년 시기 고구려 국경선의 위치 비정(비교해서 정하다라는 뜻)이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든 중국 역사지도집의 위치 비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11월에는 낙랑군의 위치 표기가 “식민사학의 논리와 똑같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미국 의회조사국(CRS)에 제출한 자료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한 내용을 담은 자료와 지도 등이 포함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사 지도 편찬사업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등 해외 학계와도 공동으로 진행되던 사업이었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설치한 한사군이 고조선 영토 내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의 연구자들이 낸 결과와 한국의 연구자들이 낸 결과가 같다는 이유로 동북아역사재단의 사업을 맡은 학자들은 ‘식민사관’에 물든 ‘동북공정 동조자’로 몰렸다. 

국회의원들은 역사 전문가들이 아니다. 2014년 결성된 ‘식민사학 해체 운동본부’가 동북아재단에 지속적으로 제기하던 내용을 제보 받은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의원회 소속 의원들은 국정감사 기간 앞다퉈 자료를 내고, 언론사는 ‘단독’을 달아 보도했다. 대중의 분노가 일자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연구에 문제가 있다”며 스스로 사업을 중단했다. 8년의 노고에 해외기관까지 관계된 이 작업은 현재까지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다. 

학자들은 정치권이 ‘동북공정’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역사비평>에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를 기고한 위가야씨(성균관대 박사과정)는 “도종환 의원실에서 지적한 지도 역시 정확히 위치를 비정한 지도가 아니었다”며 국회의원들의 지적에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면 중국의 주장 중 잘못된 부분에 대해 그것이 왜 잘못됐는지를 학문적으로 지적하면 되는데, 정치적 입장으로 접근한다”고 말했다. 맞는 사실도 일단 중국의 주장이라면 틀렸다고 반박할 것을 학자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사 지도 제작 중단 사태는 역사학계가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말을 만들고 공세적으로 반격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정치권에 의해 학문연구가 중단된 사례였다. 도종환·김태년 의원 등 국정교과서 전환에는 당론으로 반대했던 야당의원들마저도 이 사안에서는 새누리당 의원들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한국 고대사 전공자인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청와대와 교육부, 동북아재단의 관료들 가운데 일부가 1980년대 널리 퍼진 사이비 역사학에 동조하고 있고 학계의 다수를 식민사학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비평>에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를 기고한 안정준씨(연세대 박사과정)는 “언론에서는 내용을 잘 모르니 양자의 의견을 균형있게 실어주는 것처럼 50대 50으로 보도한다. 이 역시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 결과는 학문적으로 틀릴 수도 있지만 학문적으로 논파당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의 외압으로 중단됐다. 정치권의 학계 개입이라는 점에서 ‘국정교과서’와 ‘한국사 지도 편찬 중단’은 쌍둥이인 셈이다.
 

2016년 국정교과서와 파시즘 한국?

최근 한국의 분위기에서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된다면 고대사 서술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박정희 시대의 ‘사이비 역사학’의 발흥을 넘어서 ‘국정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읽힌다. 야권과 시민단체의 국정교과서에 대판 비판은 ‘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진행돼 왔다. 지난해 11월 황우여 당시 교육부총리는 “근현대사 비중을 줄이고 상고사 서술을 강화할 것”이라고 집필 방침을 밝혔다. ‘상고사’라는 말 자체를 학계에서는 쓰지 않는다. 한반도를 배경으로 하는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가 잘 모르는 대제국의 고대사’가 있다는 뉘앙스를 담은 표현이다. ‘사이비 역사학’에서 주로 사용한다. 

학자들은 한국 사회가 파시즘적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하일식 교수는 “파시즘은 정치권력이 경제·사회·문화·예술 영역 모두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며, 애국심을 강요하고, 반대하는 세력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1980년대 ‘파쇼 독재 철폐’란 말이 유행했지만 당시는 그냥 군사독재이고 지금이야말로 파시즘에 더 유사하다”고 말했다. 행정자치부와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온 국민 태극기 게양운동, 역사교과서 국정화, 부산시의 부산국제영화제 개입, 황교안 총리의 전 소방대원 태극기 부착 의무 등이 단적인 사례다. 

하 교수는 “파시즘 권력은 애국심을 진작하기 위해 고대사에 집착한다. 교과서에서도 민족의 기원을 중시하면서 ‘상고사’를 강화하고자 할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현 정권에서 누가 교과서를 만드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기경량 강사는 “파시즘의 특징은 지식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전문가 집단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전문가 집단 90%의 반발을 누르고 국정교과서를 강행한 것부터 우려스러운 토대”라고 말했다. 

기 강사는 <역사비평> 기고글에서 “현재 한국 역사학은 ‘국가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사이비 역사학의 공격’이라는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위기에 놓여 있다”고 끝맺었다. 이번 <역사비평> 필진들을 비롯, 30대 연구자들이 주축이 된 역사연구자 모임은 올 한 해 사이비 역사학을 지속적으로 학문적으로 논파하는 콜로키움을 열고 대중서를 출간할 계획이다. 

2003년 경기 가평 낙랑·고조선 유적지구에서 발굴된 나무곽무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낙랑군’ 위치가 뭐기에?


 

한국사 역사지도는 ‘낙랑군의 위치’가 문제가 돼 중단됐다. 대체 ‘낙랑군’의 위치가 뭐기에 재야 사학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국회까지 개입하게 된 것일까.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고조선을 침공해 멸망시키고 고조선 영토에 4개의 군을 설치했다. 군은 ‘도’와 같은 지방행정단위다.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 그 4개 군이다. 군이 설치됐다는 것은 고조선을 지배영역으로 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진번, 임둔, 현도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거나 위치를 옮겼다. 예외적으로 낙랑군만 400년 동안 존속해 하나의 국가처럼 이어졌다. 이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정복당해 소멸했으며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이주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전설에 나오는 ‘낙랑국’과는 다르다. ‘낙랑국’은 중국의 군현이 아니라 지방정권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미카미 쓰기오가 ‘고인돌’이 대표적인 낙랑군의 유적이라고 주장했으나, 고인돌은 기원전 3세기 유물로 시기가 맞지 않아 국내 학계에서는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낙랑군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관심사였다. 실학자들은 주로 문헌을 통해 낙랑군의 위치를 추측했다. 유득공은 평안도, 정약용은 평안도나 황해도, 이익은 요동에 있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실학자들에게 낙랑군의 위치는 사실관계의 문제였지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낙랑군의 존재는 조선은 옛날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증거로, 조선인들은 다른 민족에 기대 살아야 한다는 ‘타율성론’의 근거가 됐다. ‘낙랑군은 한반도 내에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신채호, 최남선 등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일본 학자들의 활동으로 평양 주변에 낙랑의 성곽과 무덤 등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본 학자 미카미 쓰기오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집대성해 ‘낙랑은 중국계 지배층과 토착인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라고 결론 내렸다. 

해방 이후 남북한 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지금까지 평양에서 2600개의 낙랑군 무덤이 발견됐다. 중국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낙랑군의 위치는 평양으로 합의가 돼 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도 이 견해에 따라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표기했다가 ‘식민사학’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낙랑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해서 ‘굴욕’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연구자들은 말했다. 안정준씨(연세대 박사과정)는 <역사비평>에 쓴 글에서 “낙랑군 지배층의 무덤을 조사하면 이들이 대부분 고조선 토착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멸망 후에도 토착세력이 붕괴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토착민의 협조 없이는 군현이 400년이나 지속될 수 없다. 문화는 서로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에 낙랑 무덤에서 중국 사치품이 발견됐더라도 ‘지배’의 결과가 아니라 ‘교류’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안씨는 설명했다. 이 관점에서 낙랑군은 중국이 일방적으로 고조선을 지배한 증거가 아니라 양자가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만들어낸 증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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