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ENU

언론기사

제목

평민의 양반 되기 ‘성씨·족보를 내 품에’(한겨레 2014-09-14)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9.1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695
내용
<노비에서 양반으로…>는 그 무수했던 행렬의 한 예를 파고들었다. 17세기 말 노비였던 ‘수봉’ 일가의 호적 대장을 추적했다. 경상도 단성현·도산면 등지에 살았던 한 가계의 200년 호적 기록을 좇은 보기 드문 책이다.

수봉은 경제력을 활용해 평민으로 올라섰다. 1678년 호적에서 그는 지역 세도가 심정량의 노비 59명 중 1인이었고 가족도 모두 노비였으나, 40년 뒤 1717년 호적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호적의 ‘직역’ 난에 적힌 그의 신분은 평민에 속하는 납속통정대부. 납속은 곡식을 국가에 냈다는 의미다. 숙종 때인 1678~1717년 당시 정부는 노비 면천 문서나 통정대부 등에 임명하는 공명첩을 팔아 기근 진휼 재정을 확보했다. 수봉은 재산을 내고 합법적으로 평민이 되었던 것이다.

수봉은 주인집 인근에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주인 땅을 경작하며 자기 땅도 소유했을 것으로 지은이는 본다. 노비 수봉은 2명의 노비도 소유했다. 그는 1678년엔 본관이 김해로 돼 있을 뿐 성이 없었으나, 1717년엔 성을 김으로 신고해 김수봉이 됐다.

이런 ‘성장’은 그만이 아니었다. 도산면 남성 호주(주호) 중 노비가 1678년 40%가 넘었으나 100년 뒤인 1780년엔 10% 아래로 급감했다. 1678년 호주 가운데 성·본관을 다 가진 이가 59%였으나 1717년엔 74%로 는다. 성 없이 본관만 있던 이들은 30%에서 11%로 줄었다. 본관만 있던 노비들이 성과 본관을 갖춘 평민으로 성장한 것이다.

김수봉 당대엔 이루지 못했으나, 1831~61년 그의 5세·6세손에 이르면 양반 꿈이 실현된다. 호적 직역 난에 양반을 뜻하는 ‘유학’으로 등재됐다. 노예에서 해방되고 2세기 가까이 흐른 뒤인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마침내 그 후손들은, 양반 전유물이던 유학 호칭을 누리게 된 것이다. 김수봉의 고손자 김종옥은 본관 갈아타기도 감행했다. 1825년 도산면에서 김해 김씨보다 위세가 높던 안동 김씨로 바꾼다. 도산면의 평민은 18세기 내내 비슷한 비중을 유지하다, 19세기 중엽 이후 감소하며 그에 맞춰 양반이 는다. 대대적인 양반화가 이뤄진 것이다. 신분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모두가 양반이 되는 편입의 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양반 체제 해체를 가속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 전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55110.html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