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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치문서와 해방정국··미군정 장교가 본 김구·이승만·여운형(노컷뉴스 2021-11-10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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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017
내용

버치문서와 해방정국··미군정 장교가 본 김구·이승만·여운형

SNS [신간]버치문서와 해방정국-박태균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48년의 한반도
버치 중위가 한국 근무중 남긴 보고서와 메모, 사진 등 분석한 책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줘"
"이승만은 자신 위해 돈쓰고, 김구는 역할 위해 돈써"
"여운형은 '진정한 정치인'", "김규식 가장 존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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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치문서의 박스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여운형 관련 사진은 많은 반면, 이승만 관련 사진은 거의 없다. 아마도 '코리아(Korea)'라는 사진집 안에 있는 이 사진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너무나 다른 이승만과 김구의 복장과 신발, 그리고 사진기 앞에서의 자세는 이들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원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돈에 대한 두 사람(이승만과 김구)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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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정치적 기준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고대 로마의 삼두정치에서 나타났던 정치동맹의 관점에서 내부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정치적 또는 사적 애정이 없다. 제한적 목적을 위하여 단지 임시적인 연합이 있을 뿐이다. 각각은 서로를 불안해하고 싫어한다.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정권을 잡고 나면 상대를 제거할 것이다. 삼두정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입장을 바꾸면서도 상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송진우의 암살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간의 옆구리를 공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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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과 미군정(美軍政,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시기를 재조명하는 비밀문서 상자가 열렸다. 특히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미군정 역시 두 지도자의 비교를 통해 두 사람에게 접근하고자 했다"며 "물론 버치의 이러한 평가가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버치가 두 지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인들과 정보원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문서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평가로만 치부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미군정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사이의 정치적 반목 관계도 주목할 만 하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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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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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현대사연구자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55) 원장은 신간 '버치문서와 해방정국'(역사비평사)에서 이승만이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미군정은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 했고, 한국에 없는 동안 그의 힘을 빼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려고 했다고 전한다.

이 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한국에 들어와 1948년 5월 총선거 무렵까지 한국 정치인을 담당하는 미군정 정치고문단에서 활동한 레너드 버치 (Leonard Bertsch) 중위가 기록한 문서를 박태균 원장이 분석했다. 경향신문에 6개월동안 연재한 기고문을 보완해 출간한 책이다.

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서 발견한 '버치 문서 박스'에는 버치가 한국 정치인과 소통하면서 기록한 자료들이 가득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 대한 조사ㆍ분석ㆍ보고의 문서부터 명함, 편지, 사진, 메모에 이르기까지 보물같은 자료들이 수록돼 있었다.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분석관 겸 자문관이었던 강용흘(왼쪽)과 버치가 버치의 딸들과 찍은 사진, 역사비평사 제공(원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텍사스 출신인 버치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 오하이오 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다 법무담당관으로 입대한 뒤 한국에 배치돼 존 하지(John Reed Hodge) 미군정 사령관의 지원을 받으며 30대 중반의 나이에 한국의 쟁쟁한 정치인들을 만나며 거물이 됐다. 그는 수시로 정치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치적 동향을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보고했다.

때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정치적 흐름의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도 했다. 게다가 그는 정치자금과 정치인들의 숙소와 당사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관여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국내와 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유수한 한국의 정치인들이 버치를 만나고자 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고, 다양한 상황에 대해 청원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악명 높던 경찰이 불법적으로 체포한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

버치는 자신이 만난 정치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전달했는데, 그 복사본은 물론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부 문서들이나 개인 메모 역시 보관했다. 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은 사후 그가 졸업한 하버드 대학교 옌칭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판사 임용과 관련된 메모. 김병로는 되지만 김용무는 안 된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역사비평사 제공(원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에서 핍박받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총독부에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적과도 대화하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여운형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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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치는 한국에 머물면서 여러 정치인을 만났는데 그중 여운형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버치는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겠다"며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큰 교훈을 준 인물"이라고 여운형 조사(弔辭)에 썼다. 저자는 반공적이지 않았던 여운형이 미국 정책에 부합하는 정치인은 아니었으나, 대중적 영향력이 컸고 좌파를 분열시키는 효과도 노릴 수 있어 미군정이 여운형을 끌어안으려 했다고 주장한다. 미군정은 여운형이 계속 거부하자 그의 힘을 빼기 위해 친일 행적을 찾으려 일본에까지 가서 조사를 벌였지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를 직접 그린 버치의 메모. 역사비평사 제공(원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군정의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 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 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정치 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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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정부를 수립해서는 안 된다는 김규식의 신념, 그리고 이승만이 갖고 있었던 돈과 지방에서의 정치적 힘이라는 두 요소를 제외하고도 김규식이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여운형의 죽음이었다. …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은 김규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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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치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그와 가장 많이 접촉했던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이었다. 버치는 입법의원을 통해 김규식의 지도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미군정은 45명의 관선 입법의원에 김규식을 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온전한 정치인을 선출하려고 했다. 비치의 문서를 보면 고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관선 입법의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후보가 될 수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를 달아놓은 문서. "이승만 계열의 사람","좋다" 등의 코멘트가 붙어 있는 가운데 무정부주의자 유림에게는 "폭파자", 한글학자 이극로에게는 "?"를 달아놓았다. 역사비평사 제공(원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저자는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해방과 통일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이었다"며 "기회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냉전시대의 영향 등으로 역사를 정치로 재단하는 측면이 있는데 그 시기 자료에 충실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그러한 작업들이 지금에 있어 현대 한국사회의 기원을 찾는데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버치에 대해서는 "괴짜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적 신념을 끝까지 이루려고 했던, 미군이 점령한 지역의 분단이라는 불행을 막아보려는 사람이었다"며 "카톨릭이라 선악에 대한 기준이 분명했고 공산주의자와 극우 세력 모두를 굉장히 싫어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여운형, 김규식의 명함과 신문 스크랩 등 책에 실린 사진과 메모 등도 100여점이라 당시 해방정국의 시대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여운형에게 주는 메모가 적혀 있는 김규식의 명함. 인도 델리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고하고, 당시 상황에서 너무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자문을 듣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준 메모가 왜 버치 문서 박스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사비평사 제공(원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저서로는 '조봉암 연구',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cinspai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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