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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민주주의] 5-①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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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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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 연재는 2013년 10월~11월에 역사 속 민주주의;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라는 주제로 5회에 걸쳐 진행되었던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 속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강의안을 수록한 것입니다.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5-①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5강-①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80년대 변혁운동과 민주주의 : 1980~1987


 

1. ‘80년대’라는 의미

 

‘80년대’ 라는 시기를 보는 데 어려움(혹은 난점)

 

- 이번 강의를 준비하고 대면하며 마주하는 어려움은 80년대가 ‘일괴암적’(monolithic) 시기로 인식되는 문제, 시대 체험자/비체험자 간의 자의적/편의적 해석의 가능성, 80년대가 사상과 운동으로만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의구심 등


- 그럼에도 80년대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그 이전/그 이후를 구분하는 ‘사상과 운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판단. 각성의 시대, 민족민중적 학문, 혁명의 시대 등 80년대에 대한 ‘이미 전제된 이해/해석’(先理解)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80년대의 사상과 운동이라는 ‘특이했던 시대’가 출현하고 10여년간 유지된 동력을 내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


- 80년대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는 70년대에 대한 ‘반정립’으로 80년대 ‘대안적 민주주의’를 어디/어떤 역사적 체험으로부터 도출했는가(80년 광주/사회성격/계급분석-주체)란 문제와 그 결과 제기 되었던 ‘대안적 국가’(혁명노선 및 그 소시기 전술적 형태)에 대한 문제임. 다만, 80년대에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그 자체에 대한 논쟁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어떤 대안적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과학적 판단을 위한 사회성격 논쟁에기반을 둔 계급분석와 세력배치 그리고 민주변혁을 위한 조직/정치노선이 강조된 시점


- 짧은 강의에서 모든 입장을 전부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1) (70년대와 구분되는) 80년대의 의미, 2) 80년대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재해석된 80년 광주의 문제, 3) 80년 서울역 회군에서 85년 2.12 총선 시기까지 제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 4) 이른바 ‘반미론’‘반제론’이 제기한 한반도적 차원의 대안국가 형성의 문제 그리고 5) 86년 개헌논쟁 시기제기됐던 개헌의 상 - 즉 대안적 국가권력의 형태 - 과 그 근거 등에 관해 소개하도록 함(87년 이후 논쟁과 학계에서 진행된 사구체 논쟁은 다루지 않음).

 


80년대 사상의 특성


(1) ‘혁명의 시대’ 혹은 ‘무사상의 사상의 시대’


- 80년대에 대해 각성의 시대, 계급주체가 새로이 구성된 시대(김진균) 등 의미가 부여되고 있으나 당사자, 해석자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함. 오히려 검증될 수 없는 ‘에테르’가 난무하는 시대(예: 이념적 레테르). 80년대 지식인들은 이전 시기를 ‘무사상, 무성격’이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구성한 이론, 실천에 대한 본격적 평가는유보하고 있는 상태임.


- 2000년대 들어서 80년대에 대한 남성주의, 권위주의 등 비판이 제기되었고 수용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주체들이 이것이 80년대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연원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침묵함.


- 되돌이켜 보면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만 존재했던 것은 아님(‘부상하는 사상’). 지배적인 것은 여전히 반공주의였으며(예: 유성환 - “반공국시 사건”), 미약하지만 자유주의도 공존했음. 80년대를 특정한 사상으로 ‘규정’하는 관습적 방식이 오히려 80년대 사상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함.

 
왜 8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확산 되었나
- ‘확산’은 지식인과 일부 사회운동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며, 이를 80년대 당대에 ‘대중화’라고 보기는 어려움(예: 대학, 대학생의 경우에 제한된 현상). 대학 사회도 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하게 마르크스주의가 쇄락한 것을 보면, 채 10년을 유지하지 못한 셈.


- 확산 이유로는 ‘반공주의’ ‘분단체제’ ‘80년 광주’ 그리고 현상유지적인 미국식 사회과학(근대화론, 구조기능주의 등)에 대한 반발 등 다양한 이유는 있을 것임. ‘80년 광주’가 그자체로 마르크스주의를 불러온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론과 실천의 전개과정(무장투쟁, 국가권력/조직구성 등)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함. 다만 80년 광주의 ‘제도화’는 마르크스주의 퇴조와 어느 정도 맞물리는 문제로 추정 가능함.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문제
-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내외적 비판이 이미 지나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과 억압적 국가권력,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감 그리고 지식인과 노동자의 연대가 교차하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시간’ 격차는 꽤 큰 것임.


- 하지만 이를 ‘비정상성’ ‘예외성’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일면적임. 오히려 ‘세계사적 시간대’를 한국 사회/지식인들은 경험할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해온 결과, ‘막대 구부리기’ 효과로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함.

 

- 80년대 전반이란 시간대로 보았을 때, 신군부의 등장 자체가 이전에 비해 매우 폭력적이며 그 강도가 매우 강했기에, 압도적인 폭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명료한 대항 이론이 필요했고,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마르크스주의였음.


-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실천/현실의 대안으로 자기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한국 사운동이 인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 활동가들 내부에서 CNP논쟁 등이 전개된 지 채 10년이 못되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외적 상황(현실 사회주의 붕괴)과 내적 상황(사회운동의 약화, 동원능력의 한계 - 1991년 즈음)으로 가시화됨.


-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감지한 이론의 위기와 현장 활동가(노조운동가, 조합원 등)가 감지한 상황은 ‘시간 차이’가 존재했음. 1991~93년경 노동운동 위기론이 확산되었을 시점에 대한 활동가/조합원들의 사후적 구술자료(전노협 연구, 2012)를 보면, ‘위기는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음.

 
마르크스주의를 대안으로 삼은 사회 모델
-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혹은 북한. 각각을 대안으로 사유한 맥락은 무엇인가? 하나로 수렴되거나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80년대 초반 여러 가능성이 모색된 것은 사실임.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 핀란드 역까지 등 사회주의 사회를 낭만적, 영웅적으로 그린 텍스트들이 많이 읽힘. 뿐만 아니라 87년 전후로 항일전쟁 시기 혁명적 영웅 뇌봉(雷峰) 등 혁명적 영웅주의를 모델로 한 텍스트는 흔한 독서 코스였음.


- 다만 명시적으로 대안적 사회모델을 1917년 러시아혁명, 북한 사회주의 체제로 상정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6년 사회운동 내 분파가 정립되는 즈음으로 판단할 수 있음(소위 NL/CA 구도). 그 이후 NL의 경우 북한을, CA의 경우 러시아혁명 모델(“제헌의회 소집”)을 명시화시켰고, 정치적 노선에 따라 읽는 텍스트, 사용하는 용어/개념 등이 구분되기 시작함.


- 왜 북한과 러시아를 대안으로 삼았는가는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85-86년 시점에 전자를 대표하는 ‘식민지론’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동시에 매력적이었음. 역사(항일무장투쟁), 식민지론, 품성론 등 구도는 이전 사회운동 논의 구도에서 발견하기 힘든 생경한 것이었음. 그 즈음 논의된 김일성 가짜 논쟁(서대숙), 항일무장투쟁사 등은 기존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전변시키는 효과가 존재함(마치 50-60년대 재일조선인들의 조국[祖國]에 대한 감정이 80년대 중반 한국 사회로 뒤늦게 전이된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과도한것일지 모름; 양영희 감독, 디어 평양에 등장하는 재일조선인 1세대의 멘탈리티).


- ‘금기된 것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당시 한국 지식인들은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물리력을 지닌 국가권력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이는 아마도 당연하게도 ‘성공한 사회혁명’의 모델과 사례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임. 80년대 중반 한국 지식인들에게 최초의 사회주의 모국 러시아를 모델로 사유하는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임(굳이 짜르 시기 사회경제적 조건과 한국과 유사성 등에 관해 자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임).

 


대중과 마르크스주의
- 80년대 급격히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되었다고 대중의식까지 확산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움. 87년 6월 민주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강령’(직선제 쟁취)가 80년대 대중의식의 평균치라고 볼 수 있음.

 

- 대중/대중운동 수준에서 지식인/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감/공포는 8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음. ‘노학연대’를 내세웠지만 ‘운동’ 수준에서 진행되었지 이것이 ‘기층 수준’에서 동의되고 확산되는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의 자율성을 확보한 전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함.


- 사상/운동으로서 80년대 마르크스주의(지식인)가 대중과 일상적으로 성공적으로 결합했는가는 - 지식인들의 사회변화에 대한 헌신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 차원에서 - ‘논쟁적'문제라고 볼 수 있음. 86년 5.3, 애학투련 등 사건으로 사회운동진영은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론’을 내세웠던 것임.


2. 광주, 시민군 그리고 민주주의


1989년과 2002년 5월 광주에 대한 두 가지 대담과 쟁점
- 1989년 역사비평(최장집 외, 「광주항쟁의 역사적 성격과 80년대의 반미자주화 투쟁」, 역사비평 No.5, 1989) 좌담의 주제는 광주 항쟁(가끔 “광주 사태”란 표현도 사용)을 둘러싼 ‘왜 광주인가’, ‘광주 5.15전야의 정치경제적 위기’, ‘신군부의 성격’, ‘항쟁의 한계’ 등 과 같은 쟁점이 토론됨. 토론 내용도 사회경제적 상황, 국가-상부구조상 위기 방식으로 논의됨.


- 반면 10여년 뒤 2002년 당대비평(정근식 외, 「광주20년-국가의 기억, 민중의 기억」, 당대비평 11호, 2000)의 좌담은 논의 의제가 크게 달라짐. 이는 “그 동안 많은 성취에도 우리는 많은 상실과 고통을 더 깊이 느끼고 있는지 그 괴리에 대한 성찰”이란 주제로 논의가 전개됨. 실제 <당대비평> 좌담은 대부분 80년대 학번들로 이뤄졌고[앞 좌담 중에 80년대 학번은 김민석 이외에 없음] 광주이후 20년을 맞아 질문이 멈추어진 80년 광주에 대해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주된 화두였음. 특히 국가기념일, 광주보상법 제정 이후 ‘광주의 과거화’‘광주의 국가화’ ‘항쟁의 사유화’ ‘학살 발생 지역의 정치적 경쟁력으로 문제 해결’ 등에 대해 강한 우려가 옅보임.


- 2002년 <당대비평> 좌담에서는 항쟁의 성격, 주체 등을 다루었던 89년 주제와 달리, 광주의 전국화, 광역화, 세계화(정근식), 과도한 공식적 기억으로 함몰과 그 과정에서 배제된 소수의 기억(김무용), 국가의 힘을 빌러 항쟁의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태도는 승리한 자들의 담론으로 광주가 제도화(김무용)됐다고 강하게 비판함. 또한 좌담자 내부적으로도 약간의 의견 차이가 발견되는 데, ‘운동의 산업화’ ‘새로운 과제를 광주가 포용’(예: 동아시아 평화인권 회의, 광주-부산-제주의 새로운 연대틀) ‘축제로서 광주’ ‘광주가 받은 것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 데 비해, 김무용과 문부식은 광주의 학살을 방관, 침묵, 동의했던 ‘한국사회의 구조’ 자체를 문제시 삼으며 민주주의-인권 문제가 미해결인 상태에서 동아시아 연대나 평화로 의제 이동은 과거 기억이 다시 왜곡될 가능성이 높고 억압적 국가의 인적-제도적 청산 문제의 제기는 다음 단계가 왜곡되지 않기 위한 절실한 과제. 이는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질문의 전환’임.


- 한편 89년 역사비평 좌담에서 학생운동가 김민석(80년대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일 민주당 국회의원)은 토론에서 다뤄지지 않은 내용으로 광주 당시 투쟁형태, 방법, 정치노선/조직 노선 등을 언급. 이는 ‘비조직적-자생적 항쟁’으로 광주를 의미지우는 80년대 전형적 방식임(예: 조희연 - 대중의 자발적 투쟁만으로 변혁은 불가능하고, 지도역량 문제가 광주이후 제기). 또한 80년 광주, 신군부 등장 등은 ‘필연적’인 구조적 산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엿보임. 뒷부분 김민석의 발언은 학생운동이 광주를 이해하는 전형적 방식임. 예를 들어 ‘최초의 무장항쟁’ ‘대중투쟁의 발전은 합법칙적’ ‘과학적 의미에서 폭력 투쟁화’ 등이 그것임(이는 이종범에게도 발견되는 데, ‘근현대사의 합법칙적 필연적 도정의 불가피한 통과점’, ‘우리 역사에서 보편성의 관철’ 등이 그런 인식)


- 광주 항쟁 당시 대중의 ‘요구사항’에 대해 “다수 대중의 생활상의 요구 수렴”(이종범,)도 존재하나, 전두환 퇴진 등 ‘자유민주주의’ 수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임. 하지만 낮은 요구 수준에도 ‘범시민궐기 대회’를 직접민주주의의 원형(동학농민봉기시 집강소도 언급)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나, ‘민중권력의 맹아’로 이해하지는 않음(방어적인 것. 이는 80년대 주류적 이해와 다소 거리감이 존재)


- 특히 두 대담에서 두드러진 차이는 광주와 미국과 관계임. 80년대 민주주의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가 종속-신식민지성이라면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적 국가’의 건설이란 면에서 미국-제국주의 문제는 논쟁적인 문제임. 우선 89년 좌담에서 발언을 보면, 80년 광주는 “친미적 세계관의 지적 헤게모니가 상실되는 계기”, “대중적 반미운동으로 85년 서울미문점거”.


- 반면 2002년 좌담, 특히 문부식은 80년 반미운동의 인식상 무능력(미국 환원론)을 질타하며, 제3세계 민족주의가 지닌 역기능에 대해 경고함. 구체적으로 미국을 외부의 ‘적’으로 사고하는 외인론(外因論)을 비판하며, 우리들의 무의식/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미국적 가치를 욕망하는 민중/대중은 전혀 사유하고 있지 않다고 강하게 질타함(“미국의 가치를 한국이란 탈식민의 신체 속에 내면화시키는 일, 혹은 시민종교로서 친미주의).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인의 사람의 의미가 미국=문명=근대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고 변화되고 있는지 탐색하는 것을 촉구하는 셈임(“한국인 안의 미국”). 대표적인 예로 그는, 부산 미문화원이 반환된다는 ‘쾌거’(快擧)에 대해, “한국인의 특수하고 모순된 의식이 반영된 (사건이며-인용자) ... 끝없는 선망과 콤플렉스와 등을 댄 증오”라고 꼬집는다(91-한국인의 신체에 걸린 주술)

 
시민군, 절대공동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 80년 5월에 대한 고전이 된  5월의 사회과학(최정운)의 키워드가 매우 단기간 동안의 80년대 민중론과 계급론에 기반한 80년 광주해석(이른바 시민군-항쟁파-노동계급 주도설-‘새로운 국가의 탄생’-국가중심적 해석)에 반기를 든 ‘절대공동체’라면,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김정한)의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중봉기와 그 과정에서 이의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로 인해 사후적으로 부정당한 자유민주주의’(대중봉기=>집단적 주체형성
=>새로운 사회운동 테제)라고 말할 수 있음.


- 앞선 좌담에서 5.22~27을 ‘민중자치’ 시기(전반기 수습위=투항파 주도기, 후반기=항쟁파 주도기)로 파악한 데 비해, 최정운은 오히려 20~21일 간 ‘거리투쟁시’ 짧은 절대공동체 시간과 22일 이후 해방광주=대안국가 형성으로 구분한다. 이는 양자 간의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임.


- 이런 주장을 둘러싼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를 ‘반정치의 신화’로 비판하는 것임. 김정한은 계급, 재산, 지위 등이 공동체에 용해된 시간인 ‘사랑의 공동체인 절대공동체’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명했고, 그 원인을 최정운은 80년대 광주 논의의 중심인 대안국가(항쟁파/시민군 중심의 조직과 위계구조)로 지목했지만, 사랑-절대정신-휴머니즘으로 절대공동체를 설명하는 것은 80년 광주에서 ‘정치를 소거’시키는 주장이라고 최정운의 논지를 비판함.


- 또한 80년 광주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대안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고(태극기, 애국가 및 기타 슬로건 및 요구), 오히려 80년 항쟁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긍정했던 것은 기존의 ‘대한민국’이었다는 것임. 그의 주장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80년 광주의 사후효과(“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후 복수”)로 형성된 80년대 광주 해석 속에서 ‘광주 폄하’의 가능성 속에서 ‘차마’ 발화되지 못한 것(80). 오히려 80년대에 5.18의 효과로 드러난 덧은 “대중봉기의 사후 효과로서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음.


- 시민군의 주체성으로 김정한이 지적하는 ‘형제 공동체’는 유사가족의 형태로 이후 80년대 사회운동에서 반복되어서 나타났고 이는 80년대 민주변혁운동 주체의 모델이 됨. 대표적인 것이 열사-전사-투사라는 의미 계열임. 시민군의 죽음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탄생을 낳았고, 이는 80년대 변혁운동과 사상의 형태로 반공주의/자유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게 됨.


 3. 민주변혁과 혁명 담론의 등장 : 1980~1985년

 

- 80년 광주 이후 민주변혁 논쟁은 제1단계인 85년까지, CNP에서 보여 지듯이 운동 주도이념, 주체, 운동방법, 사회성격과 그 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종속이론, 주변부자본주의론으로부터 탈각해서) ‘마르크스주의’의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감. 이 시기에 초보적인 민주변혁의 분화인 CNP논쟁, 학계에서 제1단계 사구체 논쟁 등 ‘원칙’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짐. 이는 70년대 소시민,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정상화라는 민주주의의 방향을부정하고 대안적 민주주의, 민주변혁을 위한 자기 정체성을 모색하는 단계.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논쟁과 평가
- 그 시작은 아마도 서울역 회군에 관한 문제로 추정됨. 80년 5.15~16 서울역 회군과 비상계엄 확대는 분명 민주화 운동의 패배임. 그렇다면 어떤 상황과 조건이 이런 ‘민주화의 좌절’을 낳았는지 시계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함. 그랬을 때 80년 5월 중순 사회운동의 ‘선택’ ‘전략’이 지닌 한계를 파악할 수 있음.


- 서울역 회군, 5.17 비상계엄 확대, 5월 광주항쟁 이후 80년 하반기 학생운동 세력79년 하반기와 서울의 봄 시기 운동 세력에 대한 자기 평가를 무림, 학림 각각 수행함.

 

 무림

학림(<전망>) 

 - 광주를 무력 진압한 전두환을 살인마라 규정하며 당시 학생운동은 적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민중과 괴리, 전체 역량의 효과적 발휘에 실패,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안이한 정세인식을 지녔다고 자기 비판- 전두환 정권의 본질: 국내매판자본, 매판관료, 군부 등으로 구성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정치적 외피로 “파시즘”

 

- 미군의 본질은 “영원한 우방”이 아님

 

70년대 각 부문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반정립’(낮은 조직수준, 현장준비론 비판)


- 학생운동=문제제기집단, 노동운동=문제해결 집단으로 정식화


- 무림 현장준비론 비판 : 학생운동의 정치투쟁 부대로서 역할을 경시, 민중에 대한 잘못된 우상화, 결과적으로 무림의 준비론은 대중의 정치투쟁 요구를 억제하는 데 급급하다고 비판


- 동시에 80년 5월 주전론(主戰論)도 왜 투쟁을 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제기하지 못했고, 학생회에 영향력을 관철시키지 못 했고 가두시위 지도도 방기했다고 비판


- 80년 5월 투쟁 평가 : 전술적 유연성 결여(김재규 규명, 야당 연합 등), 전두환의 본질 파악에 불철저, 시간은 민주화운동 편이라는 식의 안이한 정세관

 

- 학생운동의 과제 : (1) 민중운동의 기반으로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도, (2)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으로 대중과 괴리됐다는 ‘무림’의 주장은 현실 학생대중의 의식을 무시하는 견해라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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